가짜 논문 사건 이후 소칼은 벨기에의 물리학자 장 브리크몽(Jean Bricmot)과 함께 『지적 사기』(원제는 『Fashionable Nonsense』)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합니다. 그들은 이 책에서 자신들이 가짜 논문을 제출한 이유를 밝히고, 현대 철학자들이 과학개념과 이론들을 다루는 방식을 비판합니다.
소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으로 분류되는 철학자들이 과학을 다루는 방식을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영미권에서 이해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과학과 인식의 모호한 경계,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글쓰기, 합리적 이성에 대한 거부 등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종류의 철학이 과학개념을 심각하게 오남용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내세우며 과학을 단지 관점이나 해석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지적 사기』에서 소칼의 표적이 된 사람들은 과학개념을 자신의 학문(주로 철학)에서 잘못 사용하는 학자들인데요. 이들은 (과학자가 보기에) 하나 마나 한 뻔한 이야기를 어렵게 써서 잘난 척을 하거나, (역시 과학자가 보기에) 과학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되는 말들을 늘어 놓습니다. 소칼은 이들이, 대중들은 어차피 과학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을 테니, (말은 안되지만) 어려워 보이는 과학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독자들의 기를 죽인다고 말합니다.
이때 과학개념을 오남용하는 과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먼저 같은 용어라도 학문적으로 쓰인 표현과 일상적 용법 간에 차이가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그가 책에서 다루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봅시다.
"'비합리적(irrational)'이라는 말로 내가 가리키려는 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 상태가 아니라, 정확히 허수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라캉, 1977a, p. 28~29)
소칼은 라캉의 "정확히"라는 말이 무색하게 무리수(irrational number)와 허수(imaginary number)를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irrational과 imaginary의 수학적 의미와 일상적 용법, 그리고 철학적 개념이 혼재된 상황에서 나온 서술이라는 것이죠.
벨기에 태생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의 글들도 소칼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됩니다. 언어학, 논리학, 정신분석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녀는 보편 양화 기호를 설명하면서 ≥과 ≤을 언급하는데요. 글을 쓰면서 논리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했는지 심히 의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보편 양화사에는 ≥, ≤ 같은 기호가 없기 때문 이죠. 보편 양화사(普遍量化詞, univers al quantifier)는 술어논리로서 논리적 상황(예: 모든 x에 대하여 x는 철학자이다)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호는 ∀가 주로 사용되고요. 아마 뤼스 이리가레는 "양화"라는 말을 보고 "계량화"와 같이 길이나 무게를 재는 그림을 떠올렸던 모양입니다.
한편 과학적으로 의미 파악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어떠한 과학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말들 역시 문제가 되는데요. 소칼이 보기에 이런 용어들은 단지 의사과학(pseudoscience)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이것을 과학이라고 주장한다면요) "함수는 일종의 슬로모션이다"(들뢰즈), "복수(複數)의 굴절력이 가진 초공간", "전쟁의 공간이 철저히 비유클리드화하였다는 것"(보드리야르), "투명성은 더 이상 광선(광파나 전파)으로 구성되지 않고 광속으로 전달되는 기본 입자(전자나 광자)로 구성된다"(비릴리오) 등 이런 사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글에서 끝도 없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소칼은 이들 철학자들에 대해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카오스, 엔트로피, 불확정성 원리 등 과학이론과 개념들이 오직 과학자들만이 다룰 수 있는 과학자들만의 전유물은 당연히 아닙니다. 특허받은 것도 아닌데 철학자든 사회학자든 과학개념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야 있죠. 그러나 과학과 수학 등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은 매우 좁은 범위에서 엄밀하게 정의된 것들입니다. 따라서 과학개념을 철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차용할 때에는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과 연관되는지, 비유적이라면 어떤 점을 근거로 하는지를 명확히 밝혀야 합니다. 하지만 소칼이 공격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글에서는 철학적 사유와 과학개념 사이의 합리적 연결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수학 이야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정치 이야기를 한다든가, 생물학을 다루다가 갑자기 자본주의 비판으로 넘어가곤 하는 식이죠. (실제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요.)
앞서 언급했던 뤼스 이리가레의 글에서도 그런 부분을 엿볼 수 있는데요. 순수 문과 출신인 제가 보기에도 좀 어이가 없는 내용입니다.
"E=mc2은 성에 물든 방정식일까? 그런지도 모른다. 이런 가설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이 방정식이 성에 물들어 있는 까닭은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다른 속도들에 겨주어 빛의 속도를 특권화하기 때문이라고. 내가 이 방정식이 어쩌면 성에 물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비치는 까닭은 이것이 그저 핵무기에 사용된다는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가장 빠른 것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이론이기 때문인 듯하다." (이리가레, 1987b, p. 110)
"그러나 이 발전의 각 단계는 고유한 시간성을 가지는데, 이것은 순환적이며 우주적 리듬에 연결되어 있다. 여성이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에서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면 이는 여성의 몸이 우주와 혼연일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리가레, 1993, p. 200)
이제부턴 소칼이 지적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다른 문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과학지식사회학으로 분류되는 사상은 과학이론의 진위나 객관성 자체보다는 과학적 지식이 구성되는 과정에 사회적 요인이 어떻게 개입되는지를 밝히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과학이론의 내용을 사회학적 용어를 통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과학적 지식이 절대불변의 법칙이 (당연히) 아닐뿐더러, 그 내용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신념, 권력, 관계 등을 비롯한 과학자 집단에 대한 분석이 쟁점이 됩니다.
하지만 소칼은 이러한 과학지식사회학의 입장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과학지식사회학의 오류가 사실과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혼동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가 둥근 것"은 사실이고, "지구가 평평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는 말은 주장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과학자들은 실제 지구가 어떤 모습인지, 바로 그 객관적 사실을 탐구합니다. "과학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의 의미가 개인이 어떤 과학이론을 더 선호하느냐에 관한 것이라면 조금이나마 일리가 있겠지만, 그것이 "지동설이나 둥근 지구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말을 의미한다면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과학지식사회학이 전자를 의미한다면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이야기일 것이고, 후자를 뜻한다면 참신하지만 터무니없는 소리일 테니까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이러한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입니다. 라투르는 그의 저서 『과학의 현장』(1987)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기호학적 독해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는 상대성 이론의 사회학적 측면에 주목합니다.
소칼은 라투르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좌표계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물리학에서의 좌표계는 시공간의 좌표들 (x, y, z, t)을 사건들에 할당하는 틀인데요. 예를 들어,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두고, 남북으로 뻗은 삼일대로(x)와 동서로 뻗은 청계천로(y)가 만나는 곳에서 지상 10m 높이(z)에서 2024년 6월 27일 17시(t)에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상대 운동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좌표계는 지구의 어느 한 지점으로 하고, 다른 좌표계는 지구에 대해 동쪽으로 시속 50km로 이동하는 자동차를 기준으로 설정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두 좌표계에 각각 동일한 형태의 물리학 법칙이 취해질지, 그리고 앞의 좌표계(지구)를 뒤의 좌표계(자동차)로 옮기는 데에 어떤 방정식을 사용할지가 문제가 되는데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바로 이 두 문제를 다룹니다.
문제는 라투르가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여 서술하는 대목인데요. 잠시 소칼이 인용한 구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떨어지는 돌의 움직임에 관하여 기차 안에서 한 관찰과, 동일한 돌의 움직임에 관하여 철둑길에서 한 관찰이 일치하는가 안 하는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약 좌표계가 하나뿐이라면 해법은 나오지 않는다. 둘이라 하더라도 결과는 같다……. 아인슈타인의 해법은 세 행위자를 가정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기차 안에, 한 사람은 철둑길 위에, 마지막 사람은 저자(발언자)로서 또는 저자의 대변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다른 두 사람이 보내온 부호화된 관찰들을 겹쳐놓는 것이다."
(라투르, p. 10~11)
"특권에 대항하는 싸움은 경제학에서건 물리학에서건 동일하다. 이 말은 은유가 아니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중략)이 관찰자들을 철둑길로, 열차로, 광선으로, 태양으로, 항성 근처로, 가속 엘리베이터로, 우주의 변경으로 보내는 데서 이익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상대주의가 옳다면, 이 관찰자들은 모든 관찰자와 똑같은 이익을 볼 것이다. 상대성이 옳다면, 그들 중 오직 하나(다시 말해서 발언자인 아인슈타인이나 그 어떤 물리학자)만이 한 장소에서 (그의 실험실이나 연구실에서) 파견된 모든 관찰자들이 보내오는 자료, 기록, 측정치를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라투르, p. 23)
우선 소칼은 아인슈타인이 3개의 좌표계가 필요하다고 말한 사실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아인슈타인이 관찰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었다는 것이죠. 관찰자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사람이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소칼이 보기에 라투르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좌표계의 개념과 기호학에서의 행위자 개념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좌표계가 특권을 구상한다는 것, 과학자가 다른 이들보다 특권을 가진다는 생각은 철저하게 상대성 이론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죠. 이는 아무래도 상대성의 의미를 상대적 운동이 아닌 지점으로 생각한 데에서 혼동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로렌츠 변환식을 통해 라투르가 주장한 것과 같은 제3의 좌표계를 설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사회학적 의미의 상대주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도 지적되고요.
무엇보다도 라투르와 같은 이들이 과학을 바라보는 입장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기획한 만큼 과학과 사회에 관한 지식을 그다지 많이 알려주지는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학적 지식이라고는 수능 전날 훑어 본 『수학의 정석』이 마지막이었던 영문과 교수가 수학자 집단을 연구한다고 해봅시다. 수학에는 거의 문외한이다시피 한 영문과 교수는 수학과 교수와 연구자들이 평소에 어떤 말을 쓰는지, 수학 증명을 하기 위해 무슨 프로그램을 돌리는지, 또 학회장과 회원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열심히 관찰합니다. 연구 보조금을 타기 위한 보고서엔 어떤 말들이 들어가는지도 살펴보고요. 하지만 영문과 교수가 수학에 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한 관찰은 해당 집단의 연구와 성과에 관한 그 어떠한 새로운 지식도 산출할 수 없습니다.
비전공자가 과학자 집단을 조사하는 경우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째서 이공계 연구실엔 여성의 비중이 그토록 적은지, 또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연구 인프라는 왜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날 수밖에 없는지는 사회학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의 행동양식과 권력 관계를 열심히 관찰한다고 해서 우리가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알게 되거나 기존 이론을 평가할 수 있는 지식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멀쩡히 잘 돌아가던 양자역학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갑자기 무용지물이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소칼은 라투르와 같은 입장에 있는 학자들이 연구자 집단의 상대성과 이론의 상대성을 혼동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지난 철학 뉴스레터 7회차 “과학이란 무엇인가” 중 “발견의 논리학 vs 탐구의 심리학” 부분을 참조해 주세요) 그리고 이런 오류의 근본적인 원인은 철학자가 과학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소칼은 자신의 책에서, 라투르가 예로 든 태양의 중성미자 문제 를 언급합니다. 비전문가에게는 과학계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과학자 네트워크의 권력문제 때문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과학자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 중이며 언젠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연구를 합니다. 그리고 태양의 중성미자 문제는 2002년에 해결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