챇챇 레터 <철학의 바깥들> 매주 목요일 발행 1. 기승전 "AI" 시대
2.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
3. 이성의 종말
4. 새로운 인간 이해를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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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다 보면 우리가 SF영화 속을 살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그림도 그리고 작곡도 하는 일은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AI가 기사 한 편 쓰는 건 일도 아니게 되었고요. 오히려 지금은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의 영역을 어디까지 따라서 할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한편 AI 때문에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려옵니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할수록 수 년에 걸쳐 쌓아온 나의 지식과 기술이 한순간에 인공지능으로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커져만 갑니다.
사실 인공지능에 대한 저의 첫 의식적인 기억은 2016년, 구글이 만든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 기사 이세돌의 대국이었습니다. 당시 이세돌이 4대 1로 알파고에 패함으로써 인간은 체스에 이어 바둑의 자리도 내어주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이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 복잡한 계산을 빠르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체스나 바둑은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잘하지만, 예술과 같은 창의성이 요구되는 분야는 여전히 인공지능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러한 생각은 챗GPT나 미드저니 같은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부터 깨지고 맙니다. 단어 몇 개만 입력하면 단 몇 초 만에 인공지능이 알아서 글도 써주고 그림도 그려줍니다. 창작만큼은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이들 생성형 AI는 결과물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AI를 놀이처럼 즐길 수도 있고, 자신의 업무에 활용하여 시간과 자원을 아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생성형 AI의 결과물은 정말 사람이 한 것처럼 꽤 자연스럽습니다. 디테일에서는 여전히 약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요. 이렇게 본다면 AI가 머나먼 미래의 일 혹은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누군가의 일이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기에 앞서 인공지능과 관련된 몇 가지 개념을 간략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란 인간의 지적 활동과 인지구조를 구현한 프로그램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람처럼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독특한 점은 이걸 사람이 만들어냈다는 것이죠. 인지과학자들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와 인간 지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구현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인지과학의 기획과 가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는데요. 이와 관련한 내용은 “더 읽어보기”란의 책들을 참고해주세요.)
이와 같은 인공지능 개발의 최종 목표는 강인공지능(Strong AI)을 만드는 것입니다. 강인공지능은 약인공지능(Weak AI)처럼 인간이 입력한 제한된 정보만 기계처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규칙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는 지성적 존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반대로 생각하여 분석하거나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일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분석과 창조적 작업을 해낼 것입니다.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시선을 가진 이들은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류가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봅니다. 인공지능을 그림이나 음악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 과정이나 의료기술과 같은 분야에까지 적용한다면 그동안 기술의 제약으로 인해 인류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기꺼이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에 관한 윤리적 문제(저작권, 딥페이크, 노동윤리, 실업률 등)은 제도와 법률을 정비한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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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때문에 직업을 잃고 슬퍼하는 철학자" (Microsoft Copilot으로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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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공지능 담론에 대해선 왠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듭니다. 강인공지능의 실현 가능성이나 인공지능으로 인한 대량 실업 같은 현실적 문제는 분명 중요한 이슈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 담론은 현실적 문제 이상의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역시 던집니다. 과연 우리가 인간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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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살아라!”, “짐승만도 못한 놈!”. 흉악범이나 용서하기 어려운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이들에게 사람들이 종종 하는 비난입니다.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범죄자나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도 엄연히 주민등록증이 있는 “사람”이 분명한데, 왜 우리는 이미 사람인 사람에게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걸까요?
일상에서 사용하는 이런 표현들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이상적인 그림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인간에 대한 고전적 정의입니다. 이때 핵심은 "동물"이 아닌, “이성적인”에 있는데요. 이 표현에서 우리는 서양문명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물의 본질을 그것의 기능(ἔργον)에서 찾았습니다. 망치의 본질은 튀어나온 곳을 때려 평평하게 하는 기능에 있고, 목수의 본질은 집을 잘 짓는 능력(기능)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기능, 즉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성은 정치 행위, 종교적 의례, 추론하고 계산하는 능력, 과거를 기억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등 지적 능력이 필요한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됩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어로 말하다를 뜻하는 동사 레게인(λέγειν)의 명사형 로고스(λόγος)가 이성, 추론, 견해, 설명, 말, 계산 등 넓은 의미로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번역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성만이 인간의 기능이자 본질이 되는 걸까요? 사람도 동물처럼 섭취와 배설을 하는 동물인데 말이죠. 때로는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폭력적인 행위를 일삼기도 하죠. 이처럼 인간에게도 다른 동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동물성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이성을 꼽는 것이 조금은 성급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정의를 내릴 때 조금 더 세분화 된 구분을 합니다. 그에 따르면 존재는 그것이 속한 유(類; γένος)와 종차(種差; διαφορά)를 통해 정의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는 존재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상위 개념을 뜻하고, 종차는 해당 존재를 다른 종과 구분하는 요소로서 사물의 본질에 해당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인간은 이성적이 동물이다"라는 정의를 봅시다. 인간은 동물이라는 보다 넓은 분류에 속합니다. 인간 역시 다른 포유류나 파충류와 같은 동물들처럼 영양분을 섭취하고 배설하며, 변화(태어남과 죽음)를 겪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이 다른 종들의 동물들과 갖는 공통의 속성입니다. 반면, 종차 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는 구분되는, 인간만이 갖는 유일한 속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물론 이성이죠. 아무리 개와 말이 똑똑한다 한들, 우리 집 초코가 2차 방정식을 푼다거나 경주마가 학회에 논문을 투고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도의 추상화 능력은 오직 인간의 이성만이 갖는 기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인간을 다른 동물들로부터 구분해주는 유일한 기능이자 본질, 즉 종차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답게 살아라"라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졌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같은 인간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인 이성을 올바로 사용할 때에야 비로소 인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사람 "구실"을 한다는 표현도 이와 비슷합니다) 망치가 못질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 가치를 잃어버리듯이, 인간도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그 가치(본질)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설명을 듣고 이렇게 반문하실 구독자분들도 계실 텐데요. “그렇다면 이성적 사고능력이 부족한 갓난아기나, 사고로 뇌 손상을 입어 이성적 판단이 어려운 사람의 경우는 인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다룬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정의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 정의입니다. 갓난아기의 경우 현재는 이성적인 사고능력은 없으나 양육이 잘 된다면 이성적 능력을 지닌 시민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연적으로 이성적 능력이 제한된 것이죠. 이처럼 "이성적임"이라는 조건은 본질적 정의로서 그 내용이 바뀌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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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명의 여명기에서는 인간을 금수와 구분짓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예찬과 분석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추상적 사고는 물론이거니와 도덕과 법률처럼 사회를 결속시키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은 모두 높은 수준의 지능(이성)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는 시대마다 그 모습을 달리하여 서양문명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중세시대 인간은 신이 선물한 이성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서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동물과 자연)을 다스리는 존재로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물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던 근대에도 이와 같은 믿음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은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얼마든지 자연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얻은 지식을 문명의 진보를 위해 활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먼저 자연과학의 영역에선 진화론을 꼽을 수 있는데요. 진화론이 대두되기 이전까지는 생물은 신에 의해 각기 다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생물 종이 하나의 세포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진화론의 설명은 그때까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 인간이 더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된 것이죠.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닐뿐더러,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문명의 여명기에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점에 주목했다면, 현대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얼마나 비슷한지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까마귀는 어린아이 못지않은 높은 지능을 소유하고 있고, 문어는 사람을 알아볼 정도로 똑똑합니다. 미물이라 여겼던 곤충을 비롯하여 각종 생물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지능을 갖고 행동하는 것도 발견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과 동물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이라고 봐야할 수 있을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프로이트가 열어 보인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입니다. 물론 오늘날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과학적인 차원에서 수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경험과학의 측면에서 입증되기 어렵거나 오류인 점이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프로이트가 시도한 정신분석은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만 이해하려 했던 서구 문명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고 생각했던 이성이 실제로는 인간 이해의 극히 일부만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오히려 인간은 무의식의 영역에 더 많은 지배를 받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심리학과 뇌과학 연구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근간이 되는 원리가 이성에만 있지는 않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때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결정에 이끌릴 때가 많습니다. 노력보다는 유전이나 호르몬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고요. 인간의 뇌는 또 얼마나 속기 쉬운지 모릅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 이성에 대한 맹목적 찬양이 막을 내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1, 2차 세계대전 과 냉전일 것입니다. 종교가 더 이상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하던 바로 그 빈 공간에 들어선 것은 국가였습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불행하게도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착취와 학살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식민지배와 인종주의를 정당화하고 아무렇지 않게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이 이성의 이름으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겁니다.
물론 이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단지 이성을 오용했을 뿐이라고 말이죠. 진화론이나 무의식에 대한 연구도 그저 연구 결과일 뿐, 이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저버릴만한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을 종합해보면,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라는 고전적 정의가 인간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바라보고 있는 정의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21세기는 더이상 고전적 인간 이해가 적용되지 않는 시대인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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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발전에서 우리가 느끼는 위화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인간이 더 이상 지구상에서 유일한 이성적인 존재가 아닌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이죠.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기능이라고 믿었던 이성은 이제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창조물이 더 나은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수 년에 걸쳐 배웠던 기술을 인공지능이 단 몇 초 만에 해내는 것을 보고 느끼는 좌절감은 단순한 실업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존재론적 위협이나 공포에 더 가깝습니다. AI 앞에서 인간이 전적으로 무가치한 존재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근본적으로는 바뀌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첨단의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2천 년도 더 넘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타이틀을 고수하느라 인지 부조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과거 서양문명을 지탱했던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상을 그려볼 수 있을까요? 단번에 그려보긴 어렵겠지만, 몇 가지 조건만큼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이성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유일한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이성을 사용합니다. 이성 없이는 우리는 단 하루도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성만이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된다면, 우리는 과거의 여러 잘못된 일들(자연에 대한 그릇된 이해,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 등)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인간에게 있어 여전히 중요하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선 이성 외의 다른 특성들 (예컨대 감정이나 의식 등)도 필요한 것이죠.
둘째로 새로운 인간 이해는 인간과 인간 외의 존재들에 대한 고려를 포함할 수 있는 정의여야 할 것입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성적인 존재라는 믿음은 자연과 동물을 얼마든지 착취해도 좋다는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에 곧잘 이용됩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을 강화할수록 우리가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는 관점은 점점 더 왜곡됩니다. 따라서 새로운 인간 이해는 때로는 동물(자연)과의 공통점에서, 때로는 기계와의 유사성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정의는 기능주의적 관점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개념 자체가 갖는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기능적인 관점보다는, 대체할 수 없는 것, 계량할 수 없는 것, 환원 불가능한 것, 감정과 의식, 외부와의 상호작용 등 전통적인 인간 이해와는 다른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짧게나마 새로운 인간 이해를 위한 조건들을 다뤄보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이고 모호합니다. “그래서 그 새로운 인간 정의가 뭔데?”하고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그런 게 대체 있느냐는 식으로 말이죠. 사실 그런 반응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고전적 인간 이해(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에서 완전히 벗어나 인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자연(동물), 그리고 기계를 이해하고 다루는 방식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공지능과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변화하는 산업구조에 대응하거나 인공지능 윤리강령을 마련하는 것만큼이나 시급한 문제는 인공지능과 공존하는 시대에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 내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인간 이성과 함께, 그리고 이성을 넘어서 인간에 대해 새롭게 이해해본다면, 인공지능을 맹목적으로 예찬이나 과도하게 비난하기보다는, 인공지능과의 공존 속에서 인간 존재의 자리매김을 다시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포스트 AI 시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의 몫으로 남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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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
박종현, 『헬라스 사상의 심층』, 서광사, 2001
마쓰오 유타카, 『인공지능과 딥러닝』, 박기원 옮김, 동아엠엔비, 2015
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김명주 옮김, 김영사, 2017
<더 읽어보기>
이화인문과학원,『인간과 포스트휴머니즘』,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3
케이트 크로퍼드,『AI 지도책』,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제리 포더,『마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김한영 옮김, 알마, 2013
Judea Pearl, Dana Mckenzie,『The Book of Why: The New Scienece of Cause and Effect』, Baisc Books,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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