챇챇 레터 <철학의 바깥들> 매주 목요일 발행 1.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자
2. 상기설과 이데아의 진정한 의미
3. 문학적 철학하기
4. 이데아와 서양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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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수업 때 있었던 일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에 관한 수업이 진행되던 중에 한 학생이 교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교수님, 스마트폰의 이데아가 있나요?" 잠시 동안 말없이 생각하던 교수님은 이내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네, 있습니다."
구독자분들 중에 "아니오"라는 답변을 생각한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짐작건대 스마트폰의 이데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데아라는 고대의 철학 개념과 스마트폰이라는 21세기 최첨단 발명품이 하나의 문장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고 위화감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수업이 있던 해가 스마트폰이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강의실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돌았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왜 스마트폰의 이데아가 있다고 답변하셨을까요? 플라톤의 상기설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나기 전 이미 모든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새롭게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전에 보았던 것을 기억해낸다는 점에서 지식을 상기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리하여, 영혼은 불멸할 뿐 아니라 여러 번 태어나고 여기 지상뿐 아니라 하데스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영혼이 배우지 않은 것은 없다네. 그래서 탁월함에 관해서든 다른 것들에 관해서든 어쨌건 전에 인식한 것들을 상기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네.“ (『메논』, 81c)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스마트폰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는 걸까요? 인간의 영혼이 불멸하고 윤회한다면, 혹시 우리가 모르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미래에 나타날 일들도 미리 알 수 있는 건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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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이데아라고 하면, 보편자, 형상, 개념, 혹은 초월적인 무언가 등이 떠오를 것입니다. 감각에 의해서는 알 수 없고,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파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위와 같이 떠올린 이데아 개념은 대체로 맞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상기설에서 인간이 모든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할 때, 이 지식의 종류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의 이데아가 있다"라는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심리적 이유는, 우리가 스마트폰이라는 말을 듣고 머릿속에 떠올리는 대상이 구체적인 개별 스마트폰이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아이폰 15나 갤럭시 z플립5처럼 구체적 모델을 생각하지, 스마트폰을 만드는 기술력이나 소프트웨어 엔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곧바로 떠올리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플라톤의 영혼불멸설, 상기설 그리고 윤회설 등의 이야기를 실제적인 시간 개념으로 간주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앞서 말한 심리적 위화감을 증폭시키는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2500년 전에 사망한 인물이 어떻게 2010년대에 등장한 스마트폰의 존재를 미리 알 수 있었을까요? 상기설을 구체적인 시간 개념으로 이해하면, 이처럼 아리송한 결말에 이르고 맙니다. 따라서 상기설 그 자체보다는 플라톤이 상기설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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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배움이 없는 노예 소년을 데려다가 상기설의 증거를 직접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노예 소년이 떠올리는 지식은 "이것" 또는 "저것"으로 부를 수 있는 개별적인 것이 아닌, 기하학 증명이라는 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노예 소년에게 정사각형의 길이와 넓이에 관한 조건들을 알려주고, 이내 아이가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는 증명을 어떻게 해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즉, 상기하는 지식의 종류가 "여기 이 사람 기억하니?"와 같은 구체적 개별자가 아니라, 기하학 증명이라는 보편적 학문인 것입니다.
『메논』의 사례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모든 인간은 구체적인 경험(감각)과 무관하게, 선천적으로 학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 환경이나 신체적 결함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발현의 정도에 있어 차이가 날 순 있지만, 모든 인간은 적절한 자극과 계기가 주어진다면, 누구든지 기하학 원리와 같은 보편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스마트폰의 이데아가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명료해졌습니다. "태어나서 배운 적이 없다면 그 지식은 어디서 왔을까?"라는 물음에 "그렇다면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라는 비유적 답변으로 하데스와 윤회가 언급된 것입니다. 플라톤은 개별 지식에 대한 앎이 아닌, 보편적 지식과 원리 그 자체 혹은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인간의 선천적 능력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스마트폰의 이데아는 하드웨어, 램, 카메라 렌즈 등을 종합하여 제작할 수 있는 기술, 즉 스마트폰을 스마트폰이게끔 만들어주는 개념인 것입니다. 이런 정의라면 스마트폰의 이데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플라톤의 이데아에 관한 특징을 몇 가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위와 같은 고찰에 따르면, 이데아는 감각으로 파악될 수 없고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완전성을 지식의 표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데아의 개념은 다른 학문들보다 수학과 논리학에 가깝습니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이데아가 결코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관념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데아가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나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눈을 감거나 잠든다고 해서 삼각형의 정의와 피타고라스 정리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유럽여행을 간다고 해서 1+1이 갑자기 3이 되지는 않습니다. 수학의 정의와 기하학의 공리가 나의 주관적 인식 상태에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이데아 역시 그 존재가 개인의 감정이나 인식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데아는 인식 주관 외부에 있는 실재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주의를 빼앗기다보니, 어느새 달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손가락의 의미마저 잘못 파악하고 만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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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플라톤의 대화편엔 다양한 비유와 상징들이 등장합니다. 철학을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는 사람들도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하나 만큼은 곧잘 기억해내곤 합니다. 신화, 전설, 비유, 우화 등의 내러티브를 통한 전달 방식은 정식화된 문장을 암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습니다. 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구체적 시간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 본성에 주목했던 플라톤은 낯설고 복잡한 개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때마다 다양한 비유와 각종 설들을 등장시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플라톤과 호메로스를 대립시켜 이해하는 라이벌 구도는 그다지 바람직한 플라톤 독해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화(mythos)에서 이성(logos)의 시대로"라는 평가에 주목한 나머지, 플라톤 대화편이 갖는 문학적 구성과 재미는 간과하고 마는 것입니다. 플라톤 철학이 신화시대를 종식 시켰다는 식의 평가는 반쪽의 설명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는 신화적 말하기 방식을 통해, 철학을 위해 문학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을 추방한 자리에, 예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대화편을 통해 제시한 것이죠.
물론 그가 비유로 드는 이야기들이 부분적이나마 실제 있었던 일이나 플라톤 개인의 신앙을 표현한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영혼불멸에 관한 논증이 등장하는 『파이돈』편에서는, 죽음을 육체로부터의 해방으로 이해하고, 현명함과 정화의식(katharmos)이 연관지어 설명됩니다. 불경건하게 산 사람들이 저승에서 받게 되는 형벌과 현명하게 산 이들이 육체 없이 평온하게 지내는 모습도 묘사됩니다. 이는 마치 그의 사상이 영혼의 윤회와 해탈 혹은 열반이라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플라톤이 실제로 불자들을 만났는지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가 철학적 설명을 위해 드는 비유들이 그 자체로 일관되고 유의미한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출처를 일일이 밝혀가며 말하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가 남긴 대화편만으로는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그 이야기들을 믿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의 비유들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진지하고 열성적인 철학자이자 그 나름의 탁월한 문장가였다는 사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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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자 서양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큰 주제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탁월한 비유를 보여주었다 한들, 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이데아의 세계는 사방이 흰색인 공간 위에 떠다니는 도형과 수식들만이 가득할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내용을 결여한 이데아들의 세계는 어쩐지 공허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에서는 그의 이데아론과 함께 철학 교육을 받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다스리는 나라가 가장 이상적인 체제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대화편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와 같은 나라가 "지상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국가』, 592b)이라는 구절입니다. 플라톤 역시 이데아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이죠. 우리가 원(圓)의 정의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원을 현실에선 그릴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정치체제 역시 현실에선 찾아볼 수도 또 만들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이데아를 본으로 삼아, 이상적인 체졔에 최대한 가까운 정치체제를 만들어 볼 수는 있습니다. 정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현실의 오답을 걸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플라톤의 철학은 역설적으로 구체적이고 실천적입니다. 그가 제시한 동굴의 비유에서도 빛의 세계를 본 죄수가 다시 동굴로 돌아와 다른 무지한 죄수들을 빛으로 인도하려 합니다. 『국가』가 이상적인 나라의 원형을 그려내고 있다면, 그의 노년기 작품으로 간주되는 『법률』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한 차선의 국가가 등장합니다. 이는 분명 그가 이데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으면서도, 현실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나타내줍니다.
또한 학문적인 차원에서 그의 이데아론은 무엇이 지식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심층적인 답변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개별적이고 감각적인 것이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보편적 정의가 가능한 개념이 학문의 진정한 대상인 것이죠. (수의학과는 있지만, "리트리버학과"나 "초코학과"는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이는 분명 소크라테스의 보편적 정의 찾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물리적 실재 혹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탐구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사유 방식의 근저에는 그가 목격했던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함께, 일종의 명석함과 학자적 양심이 동시에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감각할 수 있는 개별 사례만으로는 지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는 무질서하게 흩어진 사실들을 단순하게 쌓아놓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개별적인 사례가 완전히 제거된 순수하게 이론적인 지식만이 가득한 세계 역시 현실에선 불가능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 현상은 누구나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죠. 융통성 없는 이가 아닌 이상, 어느 한 쪽을 완전히 부정하진 못할 겁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변화를 감각의 세계에 할당하고, 불변의 세계는 이데아로 이해합니다.
이는 분명 세계를 둘로 나누어 이해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지만, 저는 이것을 기준으로 그의 철학을 진정한 의미의 이원론(二元論)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여전히 이데아를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삶의 궁극적인 원인이자 원리로서 이데아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x를 x이게끔 하는 x의 본질인 이데아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론적 토대이자 근원입니다. 비록 플라톤이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위를 명백히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현실 세계를 저버리고 이데아의 세계로 도피했다는 식의 이해는 그의 철학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본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플라톤의 이데아는 개념들로 이루어진 학문의 세계이자, 존재의 원리가 되는 근원이며, 우리가 삶에서 실천하고 따라야 할 이상적인 본이 됩니다. 이처럼 이데아는 형이상학과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며 이후 서양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됩니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담은 이데아는 곧 신에 대한 개념과 연관되어 자연스레 중세의 철학으로 이어집니다. 보편자와 개별자,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등 그의 이데아론은 현상과 실재를 다루는 다양한 문제들로 변주되어 오늘날까지도 서양 철학에서의 주요한 탐구 주제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가 서양철학을 "플라톤 철학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로 이해한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뉴스레터를 쓰다 보니 문득, 플라톤이 오늘날 다시 살아나 "스마트폰의 이데아가 있나요?"란 질문을 들으면 어떤 비유를 들어 답변할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플라톤이 남긴 대화편의 비유들 속 행간을 유심히 읽다 보면, 어쩌면 우리도 다른 서양철학의 탐구 주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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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
F. 코플스톤, 『그리스 로마 철학사』, 김보현 옮김, 철학과 현실사, 1998
플라톤, 『국가』,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12
플라톤, 『메논』, 옮김, 이제이북스, 2013
<더 읽어보기>
플라톤, 『파이돈』, 정현상 옮김, 아카넷, 2023
플라톤, 『법률』,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12
버트런드 러셀, 『철학의 문제들』, 박영태 옮김, 서광사,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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