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는 작품입니다. 아마 한 번쯤 보신 적이 있을 텐데요. 흔히 이상주의를 꿈꿨던 플라톤과 현실주의 철학을 고수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묘사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철학사가들에 따르면, 시기상 두 사람이 이렇게 한 장소에서 극단적인 의견 차이로 인해 열띤 토론을 했을 가능성은 엄밀히 말해 낮다고 봅니다. 이 정도로 의견이 갈렸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쫓겨났을 것이기 때문이죠.)
저는 이 그림만큼 두 사람의 철학에 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좋은 작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철학이 대비되는 면도 분명 많지만, 깊게 파고들수록 둘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전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기획한 철학 체계 내에 있으며, 그가 스승으로부터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현실주의적 철학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형이상학』에서 그가 자신의 스승이 주장한 이데아의 논리를 반박하는 데에서 특히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가 행했던 비판에는 종종 의아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3의 인간"으로 알려진 것이 그중 하나인데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가 무한히 퇴행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비판합니다. 개별적인 인간 하나 하나로서 a, b, c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이 개별 인간들 a, b, c를 인간이게끔 하는 인간의 이데아인 X가 있다고 해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개별자인 a, b, c와 보편자 X의 또다른 공통 요소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개별자들과 보편자의 공통점만을 또 묶은 Y라는 인간의 보편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Y와 앞서 나온 존재들의 공통 요소인 Z라는 인간의 이데아가 또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데아는 무한히 만들어지게 되고, 이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겁니다.
이런 비판은 좀 당혹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스승의 철학을 잘 알고 있을 그가 마치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교양수업에서 교수를 당황시키고자 어거지로 말꼬리를 늘어잡는 학부생을 보는 것 같습니다.) 보편자인 X는 개별자인 a, b, c와 존재론적으로 다른 층위에 있습니다. 애초에 이데아의 정의가 어떤 것을 바로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주는 본질이라는 점에서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별자를 한 데 묶어 파악할 수 있는 보편자를, 다시 또 개별자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제3의 이데아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결코 이데아론을 올바로 이해한 결과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는 또한 소피스트와 같은 상대주의자들을 상대할 때에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보편적인 것을 예로 들어 논박을 하고, 플라톤의 이데아론 등과 같은 학설을 반박할 때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의 예시를 듭니다. 이쯤되면 그가 진지하게 철학을 한다기보다는, 논적을 이기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의심이 들기까지 합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만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생각되었던 것이 실은 상당 부분 스승의 개념들에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그의 책 『형이상학』에선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합니다.
"자신은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발휘/실현 상태로 있는 어떤 것이 있다. 이것은 결코 있는 대로와 달리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공간운동이 여러 가지 변화들 가운데 으뜸가며, 그 가운데서도 원운동이 으뜸간다. 이 원운동을 그것이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있다. 또 필연적으로 있는 한, 좋은 방식으로 있으며, 이런 점에서 그것은 우주의 운동의 원리이다." (『형이상학』, 1027b 5~10)
신 존재 증명으로 잘 알려진 이 대목은 훗날 중세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보다 더 엄밀하게 체계화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화를 겪으며 운동의 원인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가장 근원적인 운동의 원리인 것이 운동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중간에 운동이 중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원인은 가능적인 것이 없고 항상 현실적인 상태, 즉 비물질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물질은 가능적인 상태에 있으며, 변화를 겪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 자신이 운동을 하면 변화를 겪게 되므로, 그 자신은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운동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운동하게 하는 것(부동의 동자, unmoved mover), 이것이 바로 신(神)인 것이죠.
그런데 플라톤의 대화편 『법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들을 운동케 할 수는 있되, 저 자신을 그럴 수 없는 운동, 언제나 그러는 한 가지 있는 걸로 하죠. 반면에 저 자신을 그리고 또한 다른 것들을 언제나 운동케 할 수 있는 운동도 있는 걸로 하죠...(중략)...어떤 것이 다른 걸 변화시키고, 이것이 또 다른 걸 변화시키는 식으로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하는 것들 중의 어느 것이 처음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일까요? 다른 것에 의해 운동하게 될 경우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변화하는 것들의 처음이 되겠습니까? 실상 불가능하죠. 하지만 스스로 운동케 하는 것이면서 다른 것을 변화시킬 경우에는, 그리고 다른 이것이 또 다른 것을 그리하고, 또한 바로 이것들의 일체 운동의 어떤 시초는 스스로 자신을 운동케 하는 변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법률』, 894b~e)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한 신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운동하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차이가 있다면, 자기 자신이 운동을 하는지의 여부입니다. 두 사람의 논리 모두 각자 나름의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 혼자서 신 존재 증명을 생각해 낸 것은 결코 아닌 게 분명합니다. 신 존재 증명이나 모순율처럼 그의 스승 플라톤이 없었다면 결코 떠올리지 못했을 개념들과 논증들이 그의 저술에서 가득하기 때문이죠. 이런 식으로 그가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것으로 보이는 학문적 성취 중 상당 부분은 그의 스승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스승으로부터 빌려온 개념임을 어느 정도 정직하게 표현해줬다면, 차이점보다는, 두 사람의 철학적 공통점과 연속성에 사람들이 좀 더 주의를 기울였을지도 모릅니다.
철학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실제로 초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가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그의 스승과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하는 대목들이 책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러나 저는 무엇보다도 지식을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라는 관점에서 아리스톨레스보다는 플라톤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플라톤을 이상주의자로 묘사하지만, 그의 대화편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는 윤리적 질문,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과 우정의 정의가 무엇인지 토론하며, 현실 개혁을 위해 이상적 국가와 차선의 국가를 논하는 대화편에서 우리는 그의 관심이 결코 이데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3회차 뉴스레터 참조)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을 위한 앎을 가장 가치 있는 지식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은 앎을 욕망한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형이상학』에서 그는 어떤 목적이나 유용성이 아닌, 이론 그 자체의 지식을 가장 높이 평가합니다. 우주의 근원적인 원리는 감각이 없는, 순수한 사유의 즐거움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처럼 "이론적인 활동이 가장 즐겁고 가장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거꾸로 돌려놔야겠습니다. 보편적 원리로서의 이데아를 주장한 플라톤은 윤리적 질문과 함께 이데아를 모범으로 삼아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고민했다는 점에서, 수행적이고 실천적인 철학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지식 그 자체를 관조하는 삶을 최선의 것으로 여긴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현실의 문제는 현상의 지식들을 수집하는 것에 만족하고, 철학자인 본인은 그저 철학적 관조를 하는 삶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