챇챇 레터 <철학의 바깥들> 매주 목요일 발행 1. 철학: 정의(定義)를 찾아 떠나는 여정
2. 앎이란 무엇인가?
3. 안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
|
|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짤입니다. 딸한테 사랑이 뭐냐고 물었더니, 여러 사람 틈에서 엄마를 한 번에 찾아낸 것이 사랑이라고 대답합니다. 누구든지 가족이나 연인에 대한 애틋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짤에 등장한 내용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짤과 같은 뭉클함을 느껴본 적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아이 아버지가 아닌 소크라테스가 했다면, 아마 딸아이는 무수히 오가는 질문과 대답에 지쳐 나가떨어졌을 것입니다. "엄마를 한 번에 찾아낸 일"은 사랑의 보편적인 정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무수히 많은 예시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한 번에 찾아내는 일은 사랑이 아닌 분노와 같은 감정에서도 가능하며, 무엇보다도 사랑을 사랑이게끔 만드는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비로소 사랑의 정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남긴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개별 예시들이 아닌, 사물의 보편적 개념 정의를 찾기 위해 끝없이 질문과 답변을 반복합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의 개별 사례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사례들에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 정의를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탈레스가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보편적 답변을 내놓았다면, 소크라테스는 "x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 물음의 형식을 제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x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과정인 문답법(dialektikḗ )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처럼, 문답법에서는 하나의 정의를 찾기 위해 여러 사례들을 열거하는 귀납적 추론이 사용됩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상황과 역사적 사건들을 볼 때, 그는 귀납법을 쓸 수 있을 만큼 이미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둘째로, 문답법은 답변을 하는 이가 질문자의 말에 동의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집니다. 앞서 자신이 생각했던 정의와 전제들에 모순이 되는 사례들을 발견을 과정을 거치면서, 답변자 스스로 모순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지식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단순히 암기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서구 사회의 토론문화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 같은 유구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x란 무엇인가?"에서 x가 될 수 있는 지식의 종류는 제한적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묻는 "정의", "사랑", "용기" 등은 보편적 정의가 가능한 개념입니다. 반면 "나의 지갑에 오만원권이 들어 있다", "내일은 70%의 확률로 비가 올 것이다"등의 문장은 실제 사건과의 일치 여부에 따라 참과 거짓이 결정되는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사례들에 해당합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이런 종류의 지식은 주된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
|
|
그런데 안다는 것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일까요? 누군가가 "나는 체스를 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보통 그가 체스 두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가 단지 흑백의 말들과 체크무늬 판을 두고 "체스"라고 부른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엔 그가 실제로 체스에 어떤 규칙이 있는지는 전혀 모를 수도 있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답이 나올 겁니다. 소설가는 인간의 삶에 관한 수사학적 표현을 쏟아낼 것이고, 생물학자는 인간의 신체적 특성이나 동물적인 특징에 좀 더 주목할 것입니다. 정치인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의 기준이 무엇이며, 걸러야 할 잠재적 배신자를 알아보는 팁에 관해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내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할 때 이 "앎으로 표현되는 범위는 매우 광범위합니다. "앎"은 그 자체로 하나의 통일된 정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문맥에 따라서, 또한 파악하고자 하는 지식의 범위와 성질에 따라 그 정의가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앎(지식) 그 자체는 소크라테스가 찾고자 했던 보편적 정의로는 파악할 수 없는 걸까요? 달리 말해, 지식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필요충분조건은 없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남겼던 『테아이테토스』에서 앎의 조건에 대한 단서를 찾곤 합니다. 『테아이테토스』의 주 대화 내용이 지식의 정의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죠. 책에는 앎의 정의로 다음과 같은 후보가 거론됩니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제 생각이 나네요. 그는 설명을 동반한 참된 판단이 앎이며, 설명이 없는 것은 앎에서 배제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설명이 없는 것들은 그가 이름을 부르는 방식으로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설명을 지니고
있는 것들은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테아이테토스, 201d)
이 주장에 따른다면, 지식과 지식 아닌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인가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것의 원인을 알고 이를 설명할 수 있는지의 여부인 듯합니다. 사지선다 객관식 문항에서 남은 두 선택지를 두고 그저 감으로 찍어 정답을 맞춘 학생을 두고 우리는 그 학생이 수학을 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개념과 공식을 이해하고 있으며 배운 대로 증명을 해서 정답에 이른 학생을 두고 우리는 그가 수학을 안다고 말합니다. 전자는 우연과 요행에 의해 정답을 맞혔지만, 결코 지식(수학 원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죠.
지식에 관한 이러한 아이디어를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은 표현이 "지식이란 정당화된 참된 믿음"입니다. 물론 이 정의 역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정당화", "참된", "믿음"에 대한 정의와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이 또다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정당화된 참된 믿음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됩니다.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S가 p라는 것을 안다 iff(if and only if)
① p가 옳다
② S가 p라는 것을 믿는다
③ S가 p라고 믿는 일이 정당화된다.
그런데 철학자 게티어(Edmund L. Gettier)는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면서도 지식이 되지는 않는 상황을 제시하며 위의 세 조건이 불충분함을 지적합니다. 그가 쓴 짧은 논문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예시 중 하나를 소개해 봅니다.
스미스는 그가 기억하는 한 존스가 언제나 포드를 갖고 있었고, 방금 존스가 자기 차라고 주장했던 포드를 탔었습니다. 그래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1) 존스가 포드를 소유하고 있다
스미스가 (1)을 믿는 이유가 정당화된다고 가정해봅니다. 그런데 이제 존스는 그의 낡은 포드를 팔아버렸고, 지금은 그가 헤르츠에게서 빌린 포드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은 거짓입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1)에서 출발해 다음의 사실들을 연역논리로 도출해냅니다. (명제 P가 참이면 "P 또는 Q이다"도 참이 됩니다. 명제 Q가 거짓이어도 P가 참이면 "P 또는 Q이다"는 참입니다.)
(2) 존스가 포드를 소유하고 있거나, 브라운이 보스턴에 있다
(3) 존스가 포드를 소유하고 있거나, 브라운이 바르셀로나에 있다
(4) 존스가 포드를 소유하고 있거나, 브라운이 브레스트리포트스크에 있다
스미스는 그의 친구 브라운이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로 브라운은 바르셀로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3)은 옳습니다. 게티어가 보기에 스미스가 (1)로부터 (3)을 추론하고 이것을 믿는 일은 정당화됩니다. 하지만 존스가 (3)이 옳다는 것을 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미스가 생각한 (1)은 거짓이고, 그는 브라운이 바르셀로나에 있다고 믿을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3)이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지만 지식이 되지는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앞서 제시한 ①, ②, ③을 수정하거나 다른 네 번째 조건을 추가해야 할 것입니다. (마티아스 슈토이프, 『현대 인식론 입문』)
게티어 문제가 문제인 이유는 지식에 대한 단일하고 보편적인 정의를 찾기 어렵다는 점과 함께 지식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정에 때로는 지식이라고 볼 수 없는, 즉 거짓이 들어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비슷한 이유들로 『테아이테토스』의 소크라테스(더 정확히는 플라톤을 통해 재구성된 철학적 화자)와 그의 대화 상대 역시 지식의 보편적 정의를 내리는 데에 실패하고 맙니다. |
|
|
이제 다시 소크라테스로 돌아가서 그가 지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좀 더 살펴봅시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을 붙잡으며 보편적 정의를 물었던 내용들은 "정의", "용기", "사랑"과 같이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주 관심사가 논리학보다는 윤리학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 윤리학을 주지주의(主知主義) 윤리학으로 평가합니다. 지식을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앎(지식)이 곧 덕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선 지식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정의(正義)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정의로운 일을 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정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죠. 이처럼 선은 지식에서 나오고, 악덕은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앎(지식)이 덕이라면, 덕은 가르쳐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철학적 관점은 우리의 상식이나 직관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도 들 수 있는 반례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죠. 지나친 음주가 간을 손상시키고, 흡연이 폐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사실(지식)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웁니다. 즉 단순히 지식을 안다고 해서 곧바로 행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처럼, 우리는 용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에우데모스 윤리학』, 1216b 20~25) 원합니다. 그렇다면 앎보다는 의지와 같은 다른 무언가가 우리 삶에서 더 중요해보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무수히 많은 사례들을 열거하고 논리의 빈틈을 찾아내는 추론을 보면, 그가 단순히 개념을 정의하는 문장 하나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술담배는 몸에 나쁘다"는 사실 하나만을 아는 것만으로는 도덕적 행위를 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다 음주운전을 해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될 수 있습니다. 흡연으로 인해 발병된 폐암을 치료하느라 발생한 각종 비용은 환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의료시스템에도 부담이 될 수 있고요.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앎의 본질은 단편적인 지식 하나를 아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들에 대한 종합적 이해와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소크라테스에게 지식은 총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죠. 도덕적 행위를 하기 위한 앎은 예상 가능한 결과들에 대한 손익(고통과 쾌락)에 대한 고찰 역시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지식은 전인격적이고 그 자체로 수행적입니다. 코플스톤(F. Copleston)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앎을 사랑하고 지혜를 따른다면, 유혹과 격정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앎(지식)에 주의를 더 기울일 것입니다.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 앞에서 음주운전의 위험성에 대한 앎에 좀 더 주목하고, 의사의 진단과 건강검진 결과, 그리고 병간호할 가족들의 모습에 관한 앎을 떠올리며, 음주를 그만둘 것입니다. 즉,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앎이란 단순히 인식론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고대 사상가들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논리적 결함 역시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몇 차례 논박을 당해 오늘날엔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주장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무지한 자를 자처하며 끝없이 보편적 정의를 찾았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이 지식이 되어야 하는가에 관해서만큼은 지금도 유효하게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이견이 없는(정확히는 점수 내기 쉽고 학부모들의 항의를 받을 일 없는) 객관적인 지식을 배우는 것만을 모범으로 삼는 시대에, 우리는 과연 후대에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활자로만 남은 빈 껍데기 같은 지식만을 기준으로 삼아 가르친다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도대체 어떻게 익힐 수 있을까요?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하는 고민은 소크라테스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편적 정의를 찾아 나서는 지식의 여정은 단순히 강좌를 듣거나 개념을 암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살면서 부딪혀 가며 얻었던 경험들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렇게 얻은 보편적 정의로서의 지혜를 삶의 매 순간 적용하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지식인 것입니다. 서양철학사를 다시 읽는 구독자 여러분도 오늘 하루만큼은 철학 블로그와 유튜브에서가 아닌, 삶의 한복판에서 철학의 역사를 음미해보며 지식의 본질에 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
|
|
<함께 읽기>
F. 코플스톤, 『그리스 로마 철학사』, 김보현 옮김, 철학과 현실사, 1998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2014
<더 읽어보기>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정준영 옮김, 이제이북스, 2013
마티아스 슈토이프, 『현대 인식론 입문』, 한상기 옮김, 서광사, 2020
Edmund L.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Analysis, Vol. 23, pp. 121–23 (1963)
*위키백과에 "게티어 문제"를 검색하면 관련해서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