챇챇 레터 <영화의 바깥들> 매달 1일 발행 1. 관객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2. 한편 뇌 속에서는
3. 잃어버린 0.5초?
4. 오늘날의 할리우드와 신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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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습니다. 어떤 영화를 볼지 고릅니다. 영화관에 갑니다. 팝콘과 콜라를 사고 영화관으로 들어갑니다. 영화를 봅니다. 영화관에서 나옵니다….
지금까지 했던 쓴 말들은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한 것입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어떤 영화의 관객일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관객은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볼 것입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혹은 영화의 한 장면에 놀라거나 감동하면서 말이죠. 영화가 예술의 가능성을 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영화에 투자된 돈이 있어야 합니다. 영화는 산업과 밀접한 예술이었으며, 따라서 흥행은 그 자본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을 모으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물론 여기서는 독립영화, 실험영화, 오늘날의 ‘무빙 이미지’ 따위를 잊어버립시다. 이것들은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적인 방식과 별개로, 이론가들과 감독 역시 관객이란 문제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20세기 초반에는 프로파간다 영화들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영화로 관객들을 이데올로기에 감화시킬 것인가? 여러 사상이 경쟁하던 시기에 이는 중요한 문제였고, 영화 이미지와 관객 간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사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몽타주를 통해 관객을 공산주의로 이끌려 했던 1920년대의 소련 감독들, 혹은 영화가 아우라를 파괴하는 동시에 다시 복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발터 벤야민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이보다 좀 더 오늘날로 시간을 돌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탐구한 이론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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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잠깐 영화이론의 역사를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영화이론은 1970년대에 영미권의 <Screen>이라는 잡지의 부흥과 함께 다양한 이론들과 결합하며 본격적으로 대학의 학문으로 대접받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도 영화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비평이나 제도권 바깥에서 다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변화의 배경에는 대(大)이론(grand theory)이라고 불리는 정신분석, 기호학, 구조주의 등의 부흥이 있었고, 이러한 이론들은 인간 언어의 의미작용이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문제들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영화 역시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 독자적인 언어 모델 혹은 구조를 밝히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죠. 예를 들면, 이전의 이론은 영화가 어떻게 이야기를 구축하고 구조화하는지, 영화가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관객에게 적응시키거나 혹은 대응하게 만드는지, 카메라의 시선이나 영화관이 어떻게 ‘주체’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일군의 영화학자들은 영화가 만들어내는 의미보다 신체감각, 감정들, 체화된 경험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관객에게 전달되는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갑작스러운 장면에 놀라기도 하고, 서사를 따라가면서 주인공에게 이입해 슬퍼하거나 기뻐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어떻게 이미지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방식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즉, 영화를 보는 동안 어떻게 우리의 뇌가 정보를 처리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죠. 여기서 정보는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을 해석하면서, 동시에 어떤 감정들이나 정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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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화를 볼 때 뇌는 어떤 과정을 거칠까요? 토르벤 그로달(Torben Grodal)은 이를 ‘PECMA 플로우’라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PECMA란 Perception, Emotion, Cognition, Motor, Action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뇌와 신체 간의 상호작용 과정을 요약한 것입니다. 뇌는 시각피질, 연합피질, 전전두엽 피질, 운동피질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이에 맞춰 반응합니다. 그리고 이 모두와 상호작용하는 것이 바로 변연계 내 ‘감정 중추’입니다. 이곳을 통해 기억과 경험이 만들어집니다. 이 글에서는 자세한 디테일보다는 그 의의 정도만 밝히고자 합니다.
그로달의 이론에는 근본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과 현실 세계를 볼 때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은 완전히 같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비록 영화만이 가진 특수성이 있더라도 말이죠. 그렇다면 관객은 어떻게 영화 고유의 경험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로달이 보기에는, 지각으로부터 시청각적 뇌 구조를 거쳐 신체 근육들로 이어지는 PECMA 플로우에 답이 있습니다. 이 플로우는 상향식과 하향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플로우의 다양함 덕분에 영화를 보면서 다양한 경험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향식에는 지각적 강렬함, 정서적 포화감, 근육 긴장이 있으며, 하향식에는 주의를 위한 신호, 감정 주조, 현실성 수준 평가가 있습니다. 그로달은 이중 하향식 플로우가 문화적으로 획득되는 경험을 반영하며, 이로써 지각에 경험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실성 수준 평가는 어떻게 뇌가 영화와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지 말해주는 중요한 기제입니다. 하향식 플로우의 두 기능 역시 지식과 문화에 영향을 받지만, 현실성 수준 평가는 영화 안에 매체적 특수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설명을 피함과 동시에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현실과 비슷한 신체 반응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로달의 이론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객은 자신이 현실에서 쌓아 올린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동원하면서 영화를 보고, 이는 뇌의 정보처리 과정을 거쳐 구체적인 감정과 신체 반응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동시에, 관객은 이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관객이 영화를 단순히 현실의 반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이미지 안에서도 관객마다 다른 것에 집중하며 끊임없이 뇌를 움직이며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를 본다는 사실을 신경미학적으로 밝혀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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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는 몇몇 실험 결과에 주목합니다. 『가상계』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는데, 허사 스텀(Hertha sturm)이 어린이들의 영화 감상을 분석한 결과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정동이 가장 우선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우리의 감정이 ‘있다/없다’ 식의 배중률이 아니라 ‘0~1’과 같은 세기, 지속으로 존재함에 주목합니다. 마수미는 이러한 ‘강렬함’의 수준을 문화 이론 안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합니다. 이로써 이전의 사조가 문화를 경제적인 것에(맑시즘), 혹은 언어(구조주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았다면, 이와 다르게 새로움이 창발하는 공간으로 문화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죠.
마수미는 이 강렬함의 논리를 따르는 정동affect이 정서, 감정emotion과는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정서가 사회언어적으로 고정되어 있고 경험되는 순간부터 개인적인 것으로 제한되는 반면, 정동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마수미는 대뇌피질 전극 실험과 뇌파전위 기록장치 실험을 인용하여 자신이 정동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전자의 실험 결과, 전기 자극 이후 0.5초가 흐른 뒤에 신체가 반응합니다. 후자의 실험 결과는 외부에 소리를 지각하는데 0.3초, 신체가 반응하는 데에는 0.2초가 걸린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여기서 마수미는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뺄셈적 지각’이라고 부른 것에 착안해서, 우리의 신체가 많은 의미를 받아들인 뒤 이후 일부만 현실화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수미는 베르그송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질 들뢰즈, 그리고 오늘날 기술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친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등의 철학자를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정동이론의 정당성을 살핍니다.
나아가서, 오늘날이 ‘이데올로기 종말’의 시대가 아니라, 사실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미디어 이미지로 정동을 과포화시킨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과포화된 정동적 긴장을 통해서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감정을 만든다는 것이죠.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는 시대는 이미지들이 넘치고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이때문에 이미지들의 맥락에 집중하기보다는 즉각적인 효과가 중요해지죠. 마수미는 이러한 특성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사례로 로널드 레이건이 TV 이미지를 활용하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전실어증 환자들에게 ‘소통의 달인’이라는 별명의 레이건의 연설을 보여주었을 때, 환자들이 레이건의 연설 내용을 거의 이해했다는 실험 결과는 마수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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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동 개념이 영화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21세기 이후 달라진 영화의 양상을 사유하기 위해 많은 영화/미디어학자들은 ‘포스트-시네마’라는 이름 아래에서 다양한 연구를 하기에 이릅니다. 많은 서적과 연구, 학제들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오늘은 일단 『POST-CINEMA: Theorizing 21st-Century Film』 선집에 나온 글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이후 레터에서도 많이 언급될 예정이며, 이 책은 영어로 전문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접속해 보세요!). 이 중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의 <Post-Continuity>, 즉 ‘포스트-연속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사실 샤비로는 이전에도 자신의 저서인 『Post-Cinematic Affect』에서 ‘포스트-연속성(Post-Continuity)’이라는 개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샤비로는 이를 "각 장면 차원에서든, 전체 내러티브의 차원에서든 더 넓은 연속성에 대한 관심보다 즉각적인 효과를 선취하는 것이 우선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한동안 할리우드에서 흥행 감독이었던 마이클 베이나 토니 스콧의 영화를 분석합니다. 그들의 영화에서는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 극단적인 카메라 앵글, 빠른 컷 전환 등이 두드러지게 사용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숏 구성은 시간과 공간의 통일성이라는 감각 대신, 관객에게 연쇄적인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죠. 브루스 리드(Bruce Reid)는 2008년 당시에 이러한 할리우드 액션 장면들이 ‘인상주의적’으로 변했다며 비판합니다. 나아가 마티아스 스토크(Matthias Stork)는 자신의 연작 비디오 에세이 제목을 ‘Chaos Cinema’로 짓고, 이러한 할리우드의 액션 장면의 변화를 잡아내며 비판합니다. 샤비로는 이 연작 에세이의 세 번째 파트에 나온 불평에 동의합니다. 스토크는 세 번째 에세이에서 토니 스콧의 <도미노>의 미학적 가치를 마지못해 인정하지만, 급진적인 추상화로 인해 장르적 맥락에서 액션 영화가 아닌 일련의 아방가르드 실험처럼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상업 장르와는 다른 관객과 수용 영역이며, 야망을 품은 밀폐된 환경이라고 불평하는 것이죠. 샤비로는 이 불평, 정확히는 대중과 아방가르드 영화의 구분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로써 샤비로는 '카오스 시네마'를 보고 자란 관객들은 이런 장면들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무언가 새로운 가능성을 밝히려고 합니다. 먼저 이를 위해서 포스트-연속성의 계보를 살펴봅니다. 그 출발점은 데이비드 보드웰(David Bordwell)의 '강화된 연속성intensified continuity' 개념입니다. 보드웰은 1970년대 뉴 할리우드에서 나타난 빠른 편집, 숏 크기의 양극화, 대화 장면에서 더욱 가까워지는 프레임 등이 고전적 할리우드 스타일과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오히려 전통적인 연속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샤비로는 이것이 진정한 변화를 놓치고 있으며, 강화된 연속성이 정점을 찍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했다고 주장합니다. 21세기의 영화들, 특히 액션 영화나 액션 시퀀스에서 강화된 연속성 기법이 확장되면서 연속성 자체가 분열하고, 파편화되며 일관성이 없어진다는 것이죠. 즉, 영화적 연속성을 강화하려는 그 기법들이 되려 연속성을 파괴한 꼴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연속성은 '내러티브의 방향성'을 구조화하는 연속성이자, 동시에 '내러티브를 조직하는 시공간'이라는 의미의 연속성을 의미합니다. 앞의 <Chaos Cinema>가 지적하는 연속성의 붕괴는 후자를 의미하는 것이죠.
그러나 샤비로는 연속성이 붕괴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카오스'가 아니라 '포스트'라는 방식으로 읽어냅니다. 연속성이라는 규칙은 언제나 위반되거나 무시되는 것도 아니며, 무규칙 상태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단순히 혼란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연속성이 중요하지 않거나, 적어도 예전보다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물론 시각적으로 제공되지 않더라도, 사운드트랙을 통해 연속성이 잠재적으로 제공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연속성이 체계성과 중요성을 잃었다는 사실이며, 보드웰이 주장하듯 고전 내러티브와 동일한 목표를 설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연속성이 공간적 지향성과 시간의 흐름을 규칙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샤비로가 보기에 내러티브 역시도 시공간적 매트릭스로 관객을 이끄는 방법 중 하나이며, 우리는 이 매트릭스 안에서 다양한 감각적, 정동적 수준에서 영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다면 포스트-연속성이 오늘날 영화에서 드러나는 걸까요? 오늘날의 세계에서 공간과 시간 자체가 상대화되고 불안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샤비로는 보드웰이 최근 할리우드 액션 씬에서 보이는 스타일들을 '강화된 연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타일과 의미의 관계죠. 보드웰은 특정 기법이나 스타일적 장치를 고정된 의미와 연결 짓는 우를 범했다고 샤비로는 보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샤비로에게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단순한 기법이나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공유된 시대적 방식이라거나 '감정의 구조'라는 것입니다. 포스트-연속성이 드러나는 영화에서는 현대물리학의 시공간, 혹은 첨단 금융자본주의의 특징인 '유동적 공간', 미세한 간격과 광속 변환의 시간 속으로 진입합니다. 샤비로는 끝으로 '공간적 혼란', 정당화되지 않는 프레임, 비인격적이고 기계화된 시점으로 인한 연속성 편집의 실종, 비디오 게임의 모방, 다양한 스타일의 혼재 등 역시 오늘날 포스트-연속성이라는 형식적 전략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물론 이러한 신체를 통한 접근은 여러 비판점을 낳기도 했습니다만, 그 전에 이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다음 포스트에서는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논의는 ‘영화관’이라는 장소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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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트가 재밌으셨다면 아래 글도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 <행위기능장애로서의 예술영화: 토르벤 그로달의 PECMA 플로우를 중심으로> 김남이, 한국미학회 학술지 『미학』 제86권 3호
- <신경 가소성과 신경학적 영화/미디어 관람성> 박제철, 한국영화학회 학술지 『영화연구』 75호
- 『Embodied Visions: Evolution, Emotion, Culture, and Film』 Torben Grodal, Oxford Univ. Press
- 『열정의 시선』 그렉 스미스, 칼 플랜팅거, ungh심영섭, 남완석 옮김, 학지사.
- 『가상계』 브라이언 마수미, 조성훈 옮김, 갈무리.
- <Post-Continuity> Steven Shaviro
이런 영화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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