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철학이 모든 학문의 뿌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과거에는 철학자가 수학도 하고 생물학도 하고 정치도 했었습니다. 심지어는 천문학과 점성술이 구분이 되지 않았던 때도 있었죠. 이는 학문 간 구분이 지금처럼 뚜렷하지 않았을뿐더러, 전문용어가 세련되게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타 학문이 전제로 삼고 있는 가정들에 관해 탐구하는 철학은 오늘날 과연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한 강연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이 질의응답 시간에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청중: 학문의 역사란 무엇입니까?
강연자: 학문의 역사란 철학이 2500년 전에 제기한 물음들에 대해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지 난 500년 간 답을 하고자 시도한 역사입니다.
청중: 그렇다면 오늘날 철학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강연자: 오늘날 철학의 역할은 지난 2500년 전 철학이 던졌던 질문들이 과연 적절한 물음 이 었는지를 다시금 검토하는 과정입니다.
짐작하신 구독자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질의응답에서 강연자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접니다. 물론 강연회에 참석한 청중도 접니다. 학문의 역사에 대한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든 가상의 대화입니다.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저는 오늘날 철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실제로 위와 같다고 봅니다.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했는가, 인간은 어떻게 지식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는가 등의 철학적 물음들은 이제는 각종 분과 학문들과 응용학문들이 대답하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철학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지식을 산출하기보다는, 타 학문의 전제들을 다시금 명료한 방식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난 세기까지의 학문의 역사는 각자의 전문영역을 심화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학문의 역사에서 주목할만한 흥미로운 경향이 하나 있습니다. “학문 간 대화” 혹은 “학제 간 대화”로 불리는 이 경향성은 보통 “융합”이나 “통섭”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됩니다. 오늘날 학문이 각자의 영역에만 몰두하다 보니 다른 학문과 소통도 안 될뿐더러 현대사회의 복잡다단한 현상들을 연구하는 데에도 역부족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이와 같은 학문의 분과화를 막기 위해선 여러 학문들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가장 인지도 높은 인물이 바로 에드워드 윌슨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통섭』에서 생물학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문화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생물학의 개념들이야말로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가장 필요하고 또 중요한 학문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통섭 세계관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현상들 - 예컨대, 별의 탄생에서 사회 조직의 작동에 이르기까지 - 이 비록 길게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중략) 하지만 통섭 세계관의 요점은 인간 종의 고유한 특성인 문화가 자연과학과 인과적인 설명으로 연결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여러 과학 분과들 중에서 특히 생물학은 이런 연결의 최전선에 있다.” (p. 460, 『통섭』)
윌슨의 아이디어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구독자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위와 같은 의미에서는 진정한 학문 간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학문은 저마다 각기 다른 고유의 탐구 대상과 방법을 가지고 있고, 근본적인 수준에서 다른 학문의 개념과 방법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이 아무리 큰 성공을 이루었다고 해서 오직 자연과학만이 인간과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거나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인간을 설명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과학 말고도 무수히 많으니까요.
학문간 대화는 사실 일상적 의미의 대화보다는 헤게모니 싸움에 더 가깝습니다. 어떤 학문이 개념과 논증에 있어서 기준이 되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예를 들어 학문 간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제 생각에 사랑만큼 인류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주제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쓴 노래와 시,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종교,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 등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합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자들은 사랑을 결코 이런 방식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그저 호르몬과 신체의 화학반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결코 자연과학을 폄하 하거나 인문학이 최상의 가치를 지닌 학문이라고 주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다른 학문이 다룰 수 없는 고유한 탐구 영역을 각 학문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일 따름이죠. 국문학자와 수학자 중 누가 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상의 『오감도』라면 수학자가 더 잘 다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방송국에서 대한민국 22대 총선 결과를 분석하기 위해 정치학자 대신 현대 이론물리학자를 섭외하는 게 더 적절한 일일까요? 가위를 들고서 안내 문구가 적힌 종이를 문앞에 붙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가위로 왜 종이를 붙일 수 없냐고 불평하거나 가위로 세상 모든 걸 자를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일만큼 부조리한 일은 없을 겁니다. 애초에 가위는 얇은 종이 같은 걸 자르라고 만든 거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학문 간 대화, 문이과의 완전한 통합은 환상에 가깝습니다. 학문 간 대화와 융복합은 비슷한 체계 안에서 교차점이 있는 학문들 사이에선 제한적으로 가능할 따름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학과 정치학을 한데 묶고, 생물학과 지구과학을 함께 연관 지어 이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문과 학생이 과학적 사실에 대해 공부하고, 이공계 학생이 인문학 글쓰기를 배우는 차원이라면 모를까, 학문 간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지는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생물학에서 방점은 “사회”가 아닌 “생물학”에 찍혀 있는 것처럼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