챇챇 레터 <철학의 바깥들> 매주 목요일 발행 1. 철학이 자기계발의 원조?
2. 자기계발서가 철학이 될 수 없는 이유
3. 스토아 학파 :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자기계발-철학서
4. 스토아 윤리학의 난점
5. 철학이 자기계발이 될 수 있는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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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자기계발서를 열심히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네 꿈을 펼쳐라”라는 희망찬 메시지로 감동을 주는 책들을 주로 읽었는데요. 대입과 진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하는 시기인 10대 청소년과 20대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자기계발서의 내용들은 대부분 대동소이했습니다. 세상에 휩쓸리지 말고 뚜렷한 자기주관을 갖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고 도전하라는 내용이었죠. 물론 그렇게 열심히 읽던 자기계발서도 군대에서 읽은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 관심사가 자연스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과정에는 사실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엑셀 함수나 코딩을 알려주는 실용서들은 읽으면 곧바로 따라 할 수 있지만, 자기계발서에 적힌 내용은 곧바로 따라 하게 되지도 않을 뿐더러, 막상 읽고 나면 그 내용을 금방 잊어버리고 맙니다. 말과 글에는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지만, 읽는 이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죠. 좋은 문장 한 줄 더 읽는다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제는 대중적인 자기계발서는 거의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점의 인문학 코너를 가보면 이 책이 입문서인지 아니면 학문을 빙자한 자기계발서인지 헷갈리는 책들이 종종 있습니다. “OO으로 철학하기”, “N살에 읽는 ㅁㅁ철학”같은 시리즈들은 책 표지도 멋있고 가독성도 좋습니다. 내용도 어렵지 않고요.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철학책들이 정말로 해당 철학자의 주장과 내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지는 종종 의문이 듭니다. 통속적인 의미의 성공학이나 자기계발 내용을 담기 위해 그저 유명한 철학자의 권위만 빌려다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물론 자기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철학에 자기계발의 측면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오늘날 꾸준히 읽히는 동양고전(예컨대 공자와 장자)만 하더라도 일상에서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지침들로 가득합니다. 이는 제가 뉴스레터에서 다루고 있는 서양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사변적이거나 방대한 양의 추상적 개념들로 가득한 일부 철학자들을 제외하면, 철학자들은 모두 현실의 구체적 문제에 대한 관심의 끈을 결코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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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와 철학 모두 인생의 어떤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나 『시지프 신화』는 문학 작품임에도 실존주의 철학에서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아예 처음부터 대중을 상대로 쓰인 책들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본다면,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의 철학서가 아니라서 혹은 글을 쉽게 썼다고 해서 그것이 철학적 가치가 없다고 폄하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대중적인 자기계발서에도 역시 얼마든지 철학적 의의가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속적인 의미의 자기계발서와 철학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진리를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철학이 근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해서 보편적 주장을 하는 데에 반해, 자기계발서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대개 별다른 논리 없이 개인의 개별적 체험에 의존합니다.
예를 들어, 해가 뜨는 이유에 대한 자기계발서식 서술과 철학적(과학적) 설명의 차이를 살펴봅시다. 자기계발서의 글쓰기 방식이라면 아마 해가 뜨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할 것입니다.
“나는 어제 아침에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았고, 그저께도 똑같이 보았다. 따라서 어제 해가 졌으니,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다.” 반면에 철학적(과학적)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집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해가 뜬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인간의 감각기관의 한계 때문에 해가 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구의 자전에 의해 해가 뜨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그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변화가 관찰된 적이 없으며, 이는 보편적인 자연법칙이다.”
이 두 설명의 차이점이 보이시나요? 우선 자기계발서의 저자와 철학적(과학적) 설명 모두 감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진리를 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계발서의 저자가 근거로 삼는 내용이 개인의 체험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 이렇더라)인 데에 반해, 학문적 설명은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형식의 기술이라는 점이 둘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내일도 해가 뜨나요?”를 이웃에 사는 A씨에게 물어보는 것보다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현재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천문학적 지식에 바탕을 둔 이론을 찾아보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이처럼 학문적 설명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 언어로 기술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자기계발서의 내용이 아무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다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채 자신의 주관적 체험에만 머무른다면 결코 철학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계발서의 내용이 주어 “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법칙의 형식을 띄게 된다면, 철학의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철학책을 썼던 역사 속 철학자들은 모두 주관적 체험과 더불어 인생의 진리를 보편적인 것으로 정식화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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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학파 :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자기계발-철학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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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학파의 철학은 철학과 자기계발서의 교집합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후기 스토아 철학의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동시에 꼭 읽어봐야 하는 교양서적 베스트 순위에 항상 올라가는 책이기도 합니다. 『명상록』은 전통적인 의미의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주된 관심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들도 『명상록』 만큼은 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윤리학과 현실 문제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열띤 관심은 일반적으로 후기 스토아 철학의 특징으로 간주 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세네카와 같은 이들은 엄밀히 말해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유산을 물려받은 로마 시대 저술가들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철학적 탐구 그 자체보다도 현실 세계에서 철학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이들의 저작에선 논리학보다는 윤리학에 관한 내용을 좀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키티온의 제논(Ζήνων, B.C.335 ~ 263)이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스토아학파는 세계를 로고스(lógos)인 신(神)이 최상의 질서에 따라 배열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세계는 무질서한 혼돈이 가득한 곳이 아니라 엄격한 법칙에 따라 신이 질서정연하게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따라서 우연과 무작위성 같은 것들은 신이 만든 세계의 특징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스토아학파가 우주를 불〔火〕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스토아학파에게 있어 신은 능동적인 불로서 세계를 관장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불로 이해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스토아학파는 인간 지식의 가장 중요한 조건을 감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의 육체, 즉 물질 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지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능동적인 신의 원리가 작용하기 위해선 이 세계 역시 물질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스토아 철학은 유물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만물이 신이 지배하는 법칙에 따른다는 스토아학파의 생각은 인간 역시 신이 만든 우주의 일부로서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자연에는 신의 이성이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인간 역시 신의 이성의 일부를 갖고 있으므로 자연에 따르는 삶이란 곧 이성에 따르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은 두 가지 의의가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점은 세계시민주의적 사고와 연결됩니다. 국적, 인종, 성별, 종교 등의 차이를 넘어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동일합니다. 이성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있어 공통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반목하여 싸우기보다는, 자기 본성(자신에 내재한 이성)을 따라 살면서 이러한 자기애를 이웃과 공동체로 확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일 것입니다.
둘째로 자연에 따르는 삶을 최선의 삶으로 여기며 이를 의무로 여긴 스토아 철학은 자연에 대한 이론(우주론)과 삶에 관한 태도(윤리학)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론과 삶 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죠. 또한 이런 관점에 따르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노여워하거나 슬퍼하는 식으로 격정적인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법칙에 따라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날 따름이니, 외부의 일에 동요하는 감정들로부터 초연해지는 마음의 평안(Apatheia)이 중요해집니다. 다음의 구절은 스토아 철학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말고,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것이다." (『엥케이리디온』 제8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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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학파의 철학에 대해서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에서 규칙이 발견된다고 해서 인간이 그것에 따라야 할 의무나 규범이 곧바로 따라 나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스토아학파만의 고유한 문제점은 아니고, 고대 사상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오류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조금 더 강한 반론이 있는데요. 바로 “모든 것이 결정된 세계에서 도덕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입니다. 이는 강한 결정론을 주장하는 모든 철학적 주장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덕적 반론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보통 도덕적 선악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기 위해선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음주운전 금지!”라는 문구가 있는 경고문이 있다고 해 봅시다. 이 문구가 현실에서 의미 있게 기능하려면 운전자가 음주운전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 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운전자에게 음주운전을 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데 그가 음주운전을 했다면, 우리는 그 운전자를 처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운전자는 음주운전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죠. (어디까지나 가정상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돌을 두고서 왜 땅으로 떨어지냐고 돌에게 비난을 가하는 것만큼은 불합리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세상의 모든 일들이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단 하나도 없다면, 도덕적으로 악한 일들을 보고도 우리는 결코 악한 행위를 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토아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이성의 섭리에 따라 벌어진 일이 되어버리고 마니까요. 아쉽지만 스토아학파가 이와 같은 난점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선 명쾌한 설명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의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해보면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볼 순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자유를 이해할 때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①결과를 바꿀 수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의미로서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학교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목에 총칼이 겨누어지지 않은 이상)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지대로 숙제를 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죠. 숙제를 잘 해 간다면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좋은 점수를 받게 되겠지만, 숙제를 하지 않는다면 감점을 당하고 크게 혼날 것입니다. 숙제를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우리의 의지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죠.
반면 ②외적 강제로부터 간섭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형이 확정되어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를 떠올려 봅시다. 사형 집행장은 경비가 무척 삼엄한 데다 사형수는 손발이 꽁꽁 묶여 있어서 어떻게 해도 사형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형장이 무너져내릴 천재지변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고, 사형을 중단시킬 그 어떠한 정치적 이유도 없다고 해 봅시다. 이제 사형수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습니다. 무덤덤한 마음으로 집행관의 지시에 따라 순순히 사형을 당할 것인가, 아니면 온갖 난리를 치며 소동을 벌이다 교도관에게 두들겨 맞으며 사형을 당할 것인가. 사형수가 사형을 당한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형수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만큼은 바꿀 수가 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윤리관에 비추어 보면 ①과 같이 결과를 바꾼다는 의미의 자유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이성의 법칙에 의해 맞물려 돌아가니까요. 하지만 ②외부의 사건에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고 나에게 닥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선택하는 의미로서의 자유는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에픽테토스는 이러한 의미의 자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너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그러한 인물인 연극에서의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짧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짧고, 만일 길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길다. 만일 그가 너에게 거지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면, 이 구실조차도 또한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절름발이를, 공직 관리를, 평범한 사람의 구실을 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해야만 하는 너의 일인지라, 너에게 주어진 그 구실을 잘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것(신)에게 속한다.” (『엥케이리디온』 제17장)
즉 우리는 신이 만든 무대 위의 배우와도 같은 처지입니다. 극작가인 신이 만든 무대라는 우주에서 우리는 배역도 극의 결말도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맡은 배역을 성실히 연기하는 것뿐입니다. 신의 본성에 따라 사는 삶,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인 것이죠.
물론 “그렇다면 질서에 따를지 아니면 저항할지는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가?”라고 여전히 반문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건의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자유는 없지만, 사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자유가 있느냐는 물음에 스토아 철학의 입장에서 답해야만 한다면 “그렇다”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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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철학은 오늘날 철학이 단순히 공허한 말장난과 지적 유희가 아닌, 진정한 자기계발 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이론과 삶이 그리 멀지 않을 때, 철학은 비로소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동반자가 됩니다. 우주에 대한 이해와 삶의 실천이 하나가 될 때 를 스토아학파만큼 잘 보여준 철학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계발서가 철학이 되기는 좀처럼 어렵습니다. 하지만 철학이 우리 삶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즉 어떻게든 그 이론이 우리의 삶과 조금이라도 맞닿아 있다면, 철학은 언제든 자기계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인의 소박한 지혜가 오늘날에도 꾸준히 읽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이 단순히 사변적 학문에 머무르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계발서보다 더 가치 있는 자기계발의 정수(精髓)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21세기의 새로운 로고스, 새로운 자기계발을 또 한 번 기대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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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
에픽테토스, 『앵케이리디온』, 김재홍 옮김, 까치, 200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5
코플스톤, 『그리스 로마 철학사』, 김보현 옮김, 철학과 현실사, 1998
<더 읽어보기>
로버트 L. 애링턴, 『서양윤리학사』,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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