챇챇 레터 <철학의 바깥들> 매주 목요일 발행 1. 그건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건데요
2. 절대불변의 학문이라는 환상
3. 발견의 논리 vs 탐구의 심리학
4. 과학이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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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냥 뇌를 들여다봤으면 좋겠어요. 이런 토론하지 말고."
인식론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는 길에 같이 수업을 듣던 사람이 한 말입니다. 개념이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지, 아니면 단지 지시 기능만을 갖는 말에 불과한지를 놓고 열띤 토론이 오간 후였습니다. 수업을 같이 듣던 그분은 인간의 인식에 관해 우리가 강의실에 앉아 토론을 하는 일은 무의미하며, 인간의 뇌를 스캔해서 우리 뇌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우리가 뇌를 해부해 본다고 해서 뇌의 어느 부위에서 "개념"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그분은 끝까지 뇌를 열어보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말만 되풀이했죠.
이처럼 과학만이 지식과 진리의 표준이라고 믿는 이들의 입장을 흔히 과학주의라고 부릅니다. 과학주의는 과학의 객관성과 엄밀성 등이 학문의 유일한 기준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현상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을 표준으로 삼습니다. 즉, 철학이나 다른 학문들은 과학적 관찰과 실험에 대한 내용을 단지 기술(記述)하기만 하면 그만일 뿐이라는 것이죠. 더 이상 강의실에 앉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들(인문학도들)이 해야 할 일은 실험실에서 나온 결과들을 그저 오류 없이 잘 받아적는 일입니다.
오늘날 과학이라는 말이 쓰이는 용법을 보면 이미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과학주의적 관점으로 지식을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래 과학(science)은 지식을 의미하는 라틴어 scientia에서 왔습니다. 즉 과학은 단지 학문 일반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죠. 그러나 오늘날 과학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을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물화생지(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 학문의 표준이자 기준이 된 겁니다.
일상에서도 글을 읽거나 토론을 하다 보면 늘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입니다. 이런 표현의 이면엔 "내 주장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니 더 이상 반박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상대가 이 주장이나 논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와 무관하게, 과학적 사실 자체가 절대불변의 진리라는 권위로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죠.
과학이 오늘날 지식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과학의 탐구대상과 그것의 방법론이 이뤄낸 결과물이 있습니다. 과학은 인문학과 달리 물질을 탐구 대상으로 삼습니다. 인문학이 인간과 사상에 대해 다룬다면, 과학은 3차원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을 다룹니다. 역사적 사건이나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3차원에 존재하는 물질은 (정상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집니다.
또한 과학의 탐구 과정은 생각과 말이 아닌, 관찰과 실험 등의 감각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를 위해서는 노트와 펜이 아닌,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실험실과 각종 장비들이 필요합니다. 이는 과학의 성립 조건이 검증가능성임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타로 카드나 사주팔자는 과학이 될 수 없습니다. "올해는 일이 잘 풀릴 것이다"라거나 "물 있는 곳을 조심해라" 같은 표현은 과학적으로 옳다고도 틀렸다고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검증할 수 있거나 검증이 실제로 된다면 그것은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검증의 결과는 어느 누가 해도 동일해야 합니다. 동양인이 하든, 중동에서 하든, 과학은 그 과정과 실험이 동일하게 반복가능해야 합니다. 얼마 전 해프닝으로 끝난 초전도체 LK-99는 바로 이 검증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검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LK-99는 과학의 범주 안에 있는 탐구 대상이지만, 동료 과학자들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한 과학이 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물질이라는 객관적 대상을 보편적 기준을 가지고 검증한다는 점에서 과학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의 확실성을 담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이 지식의 표준으로 각광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와 같은 탐구대상과 방법론의 특수성보다도 과학 그 자체가 이뤄낸 성과 때문일 겁니다. 동물을 복제하고 인류를 달에 보내며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밝혀낸 과학은 지난 수 천 년간 인문학이 이뤄낸 것보다 더 많은 업적을 이뤄냈습니다. 질병을 극복하고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며 우주를 탐사하는 동안에 인문학(특히 철학!)은 대체 뭘 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저도 딱히 할 말은 없네요. 많은 인문학자들이 "그래도 아직까진 과학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라고 항변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좀처럼 과학의 위상을 꺾기가 어려워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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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과학이 정말로 절대불변의 법칙과 진리를 담보하는 유일한 학문일까요? 우리는 과학의 역사에서 한때 연금술이나 천동설이 과학의 지위를 점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자연과학이 절대불변의 진리라면, 우리는 어떻게 과학이 진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천동설이 한동안은 과학이었다가 지금은 폐기되어버린 걸까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반론 쿤은 과학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과학 연구에 있어서 과학자 집단이 공유하는 과학법칙의 이론과 응용, 도구 조작 등을 의미합니다. 특정 과학자 집단이 인정한 과학적 성취를 이뤄낸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 수행되기 위해선 과학자들을 공통된 신념체계와 표준으로 묶을 필요가 있는 것이죠. 패러다임은 과학자 집단이 행동할 실천적 토대를 마련합니다.
물리학과에 갓 입학한 학생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제 막 물리학과에 입학한 학부생은 강의에서 사용하기로 한 물리학 교재를 구입하고 교수가 가르치는 물리학 강의를 듣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자들이 쓴 학술지를 읽어보기도 하고요. 이 학생이 대학원에 입학해 물리실험실에 간다면 그는 담당 교수가 지시하는 내용에 따라 작업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물리학과 학생은 스스로 문제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과학자 공동체가 정한 범위 내에서 해당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학생은 패러다임 안에서 정상과학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때 정상과학은 과학자들에게 퍼즐 풀이를 제공합니다. 지배적인 이론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어떤 현상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지배적인 이론(패러다임)을 통해 설명하면 비로소 퍼즐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실험 결과가 이론에 들어맞는지를 과학자가 확인하는 것이 퍼즐 풀이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만일 결과가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이는 기존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확한 절차에 따라 수행하지 않은 과학자 개인이 오류의 원인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과학의 본질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 있지 않습니다)
쿤에 따르면 퍼즐 풀이는 과학을 다른 학문이나 활동들과 구분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점성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풀어야 할 퍼즐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론과 예측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문제와 그것을 지시하고 감독할 집단이 없기에 점성술은 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이죠.
문제는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나 관찰되는 내용이 계속해서 기존의 지배적 이론과 상충하는 때입니다.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변칙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죠. 앞서 든 예시와 달리 이 과정에선 전문가 과학자들조차도 해결할 수 없는 이론과 실험 사이의 괴리가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선 문제 해결을 위해 보조 가설을 덧붙이기도 하고 과학자들이 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기도 하죠.
변칙 현상이라는 위기에 봉착한 패러다임이 이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먼저 어떻게든 정상과학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②한편으론 발생한 문제를 최대한 유보시킴으로써 일단 그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죠. ③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변칙 현상에 따른 위기를 해결할 수 없는 경우 기존 패러다임은 패배하고, 새 패러다임으로 대체됩니다. 이제 새 패러다임은 기존의 낡은 패러다임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해결할 것으로 약속하고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지침을 마련합니다.
이때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존의 패러다임과 상이한 개념과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 있어서 공약불가능(통약불가능이라는 번역어를 쓰기도 합니다)하다고 표현합니다. 또한 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누적적이기보다는 단절적입니다. 마치 종교적 개종과 같이 급작스러운 과정이죠. 우리가 과학을 두고 진보와 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전 패러다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과학은 객관적 진리에 근접해 가는 방식으로 점진적 발전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과 정상과학을 통해 과학자 공동체가 수행하는 활동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쿤의 패러다임이 시사하는 바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과학이론의 채택에 있어서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요소가 더 본질적이고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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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이후 쿤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쿤에 대한 비판의 주요 요지는 객관적 진리를 지향해야할 학문의 조건과 변화 과정을 패러다임 이론으로 설명해버리면 필연적으로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역사적 상대주의에 불과하며, (쿤의 이론이 사실이라면)과학자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고 심지어는 세뇌되었다고까지 말하며 쿤의 이론을 혹평합니다. 스스로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믿는다고 주장한 포퍼에 따르면, 과학의 본질은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비판적 특성에 있지, 과학자 공동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나 심리학적 분석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또한 포퍼는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천문학에는 잘 들어맞을지는 모르지만, 물리학이나 생물학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패러다임 이론이 적합할지 모르나, 물리학과 생물학에서는 오랜 기간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경쟁하는 이론들 사이의 끝없는 토론이 있었다는 겁니다. 물질의 본성에 관한 물리학의 토론이나 진화 이론에 관한 다양한 학설들의 경쟁은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실제 과학사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포퍼는 쿤이 구조의 문제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언어가 있을 수는 있어도 번역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한 언어는 없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서로 다른 이론들을 비교하고 평가하면서 진리에 더 근접한 이론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포퍼는 상이한 언어와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에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쿤이 단지 어려움을 불가능으로 과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죠.
새로운 과학이론을 평가할 수 있는 합리적 기준(발견의 논리)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대표적으로 라카토슈(Imre Lakatos)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 그의 모든 논증을 다룰 수는 없지만("함께 읽어보기"에 나온 책을 참조해 주세요), 일반적으로 그의 주장은 세련된 반증주의로 요약됩니다. 기존의 이론을 위협하는 사례가 등장했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기존 이론을 고수하거나 새 이론을 택할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 기준을 반증주의 모델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죠. 라카토슈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기획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비판의 포화를 맞은 쿤은 반론들에 대해 어떻게 응수했을까요? 먼저 쿤은 자신이 과학의 발전을 믿는다는 점에서 상대주의자가 아님을 밝힙니다. 그 역시 과학이 지향하는 정밀성, 범위, 단순성, 생산성 등의 가치가 과학의 발전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죠. 연금술을 가르치는 화학 교사나 천동설을 인용하는 천문학자가 없는 것처럼 과학은 과학의 가치들에 따라 낡은 이론이 새 과학이론으로 완전히 대체된다는 점에서 불가역적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가치들을 과학적 탐구 과정에 적용하는 데에 있어 모든 과학자가 동일하게 작업을 수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과학이론을 택하는 데에 있어서 누군가는 정밀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과학자는 단순성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즉, 과학의 규칙들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라면 쿤을 상대주의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비판자들의 묘사에 따르면 과학이론의 평가 과정이 마치 마녀사냥이나 인민 재판처럼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쿤이 주장한 바는 일반 대중이 아닌 어디까지나 과학자 전문가 집단에 의해 정상과학과 과학혁명의 구분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과학계, 즉 검증된 과학자 공동체가 과학적 지식을 산출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검증된 과학자들에겐 누가 자격을 부여하나요?"라는 질문이 잇따를 수 있습니다. 순환 문제를 제기하는 이 물음에 대한 쿤의 가능한 답변은 다른 이론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최초의 과학이론을 바탕으로 정상과학과 과학자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문학자는 노트와 펜을 가지고 강의실에서, 심지어는 산책하면서도 작업을 할 수 있지만 과학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값비싼 실험 장비는 정부의 지원이나 대기업의 후원 없이는 개인이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죠. 게다가 과학 탐구는 골방에 갇힌 개인이 하는 게 아니라 동료 과학자와 함께합니다. 따라서 과학은 본질적으로 그 성격 자체가 사회학적인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과학자 공동체에 대한 관심 없이 과학이론의 발전을 평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쿤의 답변의 요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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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과 과학의 본질은 지금까지도 논쟁의 대상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장에 있는 과학자들은 정작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여전히 실험실에 출근하고 과학계 내부의 절차에 따라 학술지에 자신의 실험 결과를 발표합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과학계 외부에 있는 인문학자들의 전유물(어쩌면 남은 몫)일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과학의 본질에 대한 저의 견해가 궁금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인문학과 달리(뉴스레터 1회차 참고) 자연과학의 조건과 발전 과정에 대한 학문적 설명은 탐구의 심리학보다는 발견의 논리를 지향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 공동체에 대한 사회학적, 심리학적 연구와 분석도 중요하지만, 과학 이론 그 자체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탐구의 심리학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이는 제가 과학의 객관적 진리와 합리성을 지향하며, 극단적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발견의 논리만이 과학이론의 이해에 있어 절대적인 가치라거나 과학주의가 학문의 표준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단지 과학은 과학만의 할 일이 있고, 인문학은 인문학만의 일이 있다고 여길 따름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발견의 논리일까요, 아니면 탐구의 심리학일까요? 더 나아가 과학이 다른 학문과 구분되는 이유, 즉 과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과학의 권위와 위상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지금, 과학의 성과들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지식이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그 지식을 탐구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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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
토마스 새뮤얼 쿤, 『과학혁명의 구조』, 김명자, 홍성욱 옮김, 까치, 2013
칼 포퍼, 토머스 새뮤얼 쿤, 임레 라카토슈, 『현대과학철학 논쟁』, 김동식, 조승옥 옮김, 아르케, 2002
<더 읽어보기>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학과 근대 세계』, 오영환 옮김, 서광사, 2008
Burtland Russel, 『Human Knowledge: Human Knowledge: Its Scope and Limits』,
Routledge,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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