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가 힐쉬베르거의 평가처럼 중세철학은 고대와 근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사상의 문화유산이 단절되지 않고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세철학자들의 공로가 있었습니다. 흔히들 서양 근대철학이 종교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합리적 이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관을 구축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서양 근대철학을 잘 살펴보면 중세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발견될 때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다음 인용문을 잠시 살펴볼까요?
(A) "나는 실체란 자신 안에 있으면서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즉 실체 는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B)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
(C) "신 또는 신의 모든 속성은 영원하다."
위 인용문 (A), (B), (C)는 서양 근대철학자인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등장하는 구절로서 각각 정의3, 정리15, 정리19에 해당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철학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곧바로 『에티카』를 읽는 독자들은 적잖이 당황할 수 있습니다. 시작부터 종교적이고 사변적인 특징을 띄는 철학적 논의가 등장하기 때문이죠. 반면 고대와 중세철학을 시간 순서로 착실히 공부한 독자라면 『에티카』에 등장하는 논증들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독자들은 동일한 개념들과 전제들을 가지고 스피노자가 어떻게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는지를 꼼꼼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양 근대철학자들은 고대와 중세의 사상적 유산을 계승하거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용하여 새로운 사상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카르트와 신학적 난점에 답하고자 『변신론(辯神論)』을 쓴 라이프니츠, 그리고 현대에도 끝없이 인용되고 재해석되는 스피노자 등의 철학자들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근대가 시작되면서 사상가들 대다수가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가치관의 의미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세와 근대의 시대적 구분점은 종교 권력과 세속국가의 분리에 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개인의 삶을 구속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적 세계관의 영향 하에 살고 있었죠. 합리적 이성주의자를 자처했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자신의 사상체계를 구축하거나 난점에 부딪힐 때마다 신을 찾았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입니다. (신이 철학적으로도 시들해지는 때는 한참 후의 일입니다.)
중세철학이 다루는 사상의 깊이와 논의의 다양함은 오늘날 우리가 중세철학을 공부해야 할 또다른 이유입니다. 중세철학은 신에 관한 논증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등 철학 전반에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며 각각의 논의들을 심도 있게 해석하고 발전시켜나갔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에 등장합니다.
(이하 에: 에보디우스, 아: 아구스티누스)
아: 그러면 해보자. 먼저 그대에게 묻겠는데 신체의 내 감각과 그대의 감각이 동일한가. 그렇 지 않으면 나의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것이고 그대의 것은 어디까지나 그대의 것인가? 만약 그 렇지 않다면, 그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내 눈으로 본다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에: 같은 부류에 해당하지만 우리로서는 보는 감각이든 듣는 감각이든 그밖의 감각이든 개별 감각을 가진다는 데 전적으로 동조합니다. 사실 사람은 보기만 할 뿐 아니라 듣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밖의 어떤 감관으로든 사람은 남이 감지하지 못하 는 무엇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감각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것이고 나의 감각은 어디까지나 나의 것입니다.
아: 내적 감관에 대해서도 같은 대답을 할 셈인가? 아니면 달리 대답할 셈인가?
에: 절대로 달리는 대답 않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의 내적 감관은 나의 감각을 느끼고 당 신의 내적 감관은 당신의 감각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는 사람한테서, 자기가 보는 그 것을 나도 보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내가 보느냐 못 보느냐는, 그것을 나한테 묻는 사람 이 아니라 바로 나만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 그래? 그런데 우리 각자가 자기 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무엇을 사유하고 있는 동안에 그대는 사유를 않는 수가 있고, 내가 알면서 그것을 생각하더라도 그대는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에: 우리 각 사람은 각각의 고유한 지성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유의지론』, VII.15.)
경험의 사밀성(私密性) 또는 현대 심리철학에서의 감각질(感覺質) 개념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 경험, 예컨대 시원함이나 통증 같은 것들은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관적인 특징을 지닙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의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위해 진통제를 처방하고, 인지과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닮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개발합니다. 남이 관찰할 수도 없고,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지각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상호주관성과 보편적 지식이 가능할 수 있는지는 현재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철학적 주제입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구성한 대화편이 현대 심리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1,000년 전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오늘날의 철학자들만큼이나 인간의 인식과 지각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현대철학자들 못지않게 세부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를 펼쳤습니다. 단지 당대에는 지금처럼 전문용어가 발달하지 않았고, 같은 문제라도 전혀 다른 맥락에서 논의되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죠. 그리도 이는 다른 중세 사상가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영민하고 명석한 철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