챇챇 레터 <철학의 바깥들> 매주 목요일 발행 1. 신 존재 증명은 대체 왜 하는 걸까?
2. 신에 이르는 다섯 가지 길 (feat. 토마스 아퀴나스)
3. 신 존재 증명의 난점들
4. 신 존재 증명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기
5. 신 존재 증명의 한계와 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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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너머에 뭔가가 있다는 믿음은 우주의 역사만큼이나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일을 저지른 이에게 벌을 내리기도 하며,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고 만물을 주관하는 신은 그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신의 존재는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물론 초월적 존재에 대한 회의적 시선과 무신론이 일반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은 요즘은 이전처럼 진지하게 신의 존재를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일신을 믿는 종교나 유신론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는 학문적으로 신의 존재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선 오히려 신에 대한 믿음에 때문에 여러 사회적 갈등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중세 1000년의 시간은 오늘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중세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자명한 진리였으며,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이 구원 받으리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처럼 세계관이 완결된 때는 없었습니다. 물질문명은 로마 시대 이전으로 퇴보했을지언정, 정신세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던 시기를 살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대체 중세철학자들은 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그토록 애썼던 걸까요? 신의 존재가 이미 자명한 것이라면 굳이 따로 증명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또 한편으론 초월적 존재를 인간의 이성으로 입증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의문 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신의 존재는 믿음의 대상이지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으니까요.
중세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이러한 비판점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데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그의 글에서 “철학자”라는 보통명사는 아리스토텔레스 단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를 활용했던 그는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를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신학대전』을 집필한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론해나가는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알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중세철학자들에게 있어 신의 존재는 믿음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합리적 사고를 통해 추론되고 입증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신의 존재는 마치 거대한 젠가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기둥과도 같아서, 이 기둥이 흔들리거나 빠지면 전체가 무너지고 맙니다. 유신론의 모든 주장과 철학적 논변들이 신의 존재를 가장 중요한 전제로 삼고 있는 만큼, 신의 존재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탄탄한 논리가 뒷받침되어야만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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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이르는 다섯 가지 길 (feat. 토마스 아퀴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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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저서 『신학대전1』에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다섯 가지 논증을 제시합니다. 중세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이 논증들은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입증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중세철학자들의 노력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하 ①~⑤는 『신학대전1』 제2문 3절의 내용을 정리한 것임)
①운동으로부터의 논증 :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운동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이행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이런 운동은 분명 실재합니다. 그런데 운동을 하지 않는 것들(가능태에 있는 것들)은 오직 운동하는 상태의 것들(현재태에 있는 것들)에 의해서만 움직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동시에 가능태이면서 현실태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해서만 움직여질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무한히 계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하면서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최초의 운동자가 제일원인으로 있어야 하며, 그것이 곧 신입니다.
②작용원인의 본질에 의한 논증 : 우리는 현실에서 작용원인의 계층을 관찰하며, 어떤 것이 그 자체의 작용원인인 경우는 없으며 그러한 것이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원인이 없이 무한히 원인이 소급된다면 중간 원인(결과)과 최후 원인(결과) 역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불합리한 결론입니다. 따라서 모든 원인들의 최초 작용원인이 존재하며, 이것이 곧 신입니다.
③가능성과 필연성으로부터의 논증 : 자연에는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생성과 소멸을 겪는 이러한 존재들은 언제나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a)어떤 시점에선 자연의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기에, (b)과거의 언젠가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우연적이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은 불합리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필연적인 존재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모든 필연적 존재는 다른 것에 의해 필연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필연성의 원인이 무한히 소급될 수 없으므로, 어떤 존재는 그 자체로 필연성을 갖고 있으면서, 다른 것들로부터 필연성을 부여받지 않고 다른 것들의 필연성의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입니다.
④사물의 등급에 의한 논증 : 사물의 다소 간의 차이는 최대인 어떤 것에 따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비슷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비교의 가장 큰 기준점이 되는 가장 참되고 선하며, 가장 위대한 존재가 있습니다. 어떤 유(類)에 있어서 최고인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되며, 따라서 존재와 선과 완전성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따라서 신이 존재합니다.
⑤세상의 통치에 의한 논증 : 이 세계에는 지식이 없으면서도 어떤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관찰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들은 어떤 지식과 이지를 가진 존재의 지시에 의하지 않고는 목적을 향하여 움직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자연물의 목적을 지시하는 이지적인 실재의 신이 존재합니다.
위의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에 공통된 특징 하나가 있습니다. 구독자 분들 중에서도 알아차리신 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앞서 소개한 논증들은 모두 예수, 십자가, 구원 등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특수한 종교적 용어를 단 하나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논증의 방식이 하나가 아니라 (조금씩 다른)다섯 가지입니다. 이는 다섯 가지 논증이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논증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논증 ①, ②, ③이 무한 소급이 불가능하다는 아이디어를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논증인데요. 우리가 지식을 갖기 위해선 원인에 대한 앎이 필요하며 이 원인은 무한히 퇴행할 수 없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섯 살 딸 아이가 아빠에게 왜 비가 오고 난 다음에 무지개가 생기는지 물어본다고 해봅시다. 아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알기 쉽게 딸아이에게 설명합니다. “공기 중에 생긴 물방울에 햇빛이 통과하면서 알록달록한 색깔이 만들어진단다.” 그런데 딸 아이가 계속해서 “왜?”라고 질문합니다. 당황한 아빠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나가지만 딸 아이는 그칠 줄 모르고 왜라고 질문합니다. 빛의 굴절과 반사, 색상을 지각하는 원리, 태양의 운동 등등... 끝없이 이어진 설명은 이제 150억 년 전 빅뱅까지 왔습니다! 마침내 설명이 끝나는가 싶었지만, 딸은 또 질문합니다. “왜?”
“왜?”라는 질문이 무한히 계속된다면 딸 아이는 무지개가 생기는 원리에 대해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불합리하죠. 원인은 일정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가다가 멈춰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유의미한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죠. 존재도 마찬가집니다. 존재의 원인이 무한히 퇴행한다면 존재에 대한 원인을 영원히 알 수 없을 테니까요.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무한 소급을 언급할 때의 무한은 수학적 개념의 무한대(∞)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수학적 의미의 무한은 우리가 얼마든지 이해하고 수학적 계산을 위해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무한 소급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면 매우 불합리한 결과가 잇따를 것입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논증이 구체적 시공간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한 소급이 불가능하다는 논증의 취지는 우리가 실제 역사 속 아버지의 아버지를 계속 추적해서 태초의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앞서 소개한 논증들은 생성과 소멸을 겪는 존재들은 모두 자신의 원인을 갖는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형식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실증적으로 신에 대해 탐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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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 외에도 신의 존재를 입증(했다고 주장)하는 다양한 논증들이 있습니다. 뉴스레터에서는 다루지 않으나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도 잘 알려진 논증입니다. 또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저술에서도 신의 존재를 추론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고요. 그리고 철학자들의 직간접적인 증명과 추론 외에도 기적, 신비체험, 문헌 등 논증의 성격을 띄지 않은 진술까지 포함한다면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논변들은 셀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앞서 소개해드린 논증들, 그리고 주변에서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변들이 만족스러우신가요? 구독자분들께서 유신론을 지지하든 무신론을 지지하든 간에, 알려진 논증들을 처음 접하신 분들은 조금은 실망스러우실 수도 있겠습니다. 치밀한 논증을 기대했는데, 어쩐지 맥빠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또 어딘가 틀린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는 쉽사리 설명이 되지 않는 찝찝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철학자 앨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 1932년 11월 15일 ~)는 유신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이 제시한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모든 논증이 실패로 끝났다고 평가합니다. 유신론 철학자들이 모든 이들(유신론자와 무신론자 모두)를 만족시키고 누구나 납득할 만한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본 것이죠. 그는 자신의 저서 『신과 타자의 정신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증을 포함하여 유신론 전통에서 주장되었던 논증들을 하나하나 상세히 분석하여 논리적 오류를 찾아냅니다.
앞서 살펴본 다섯 가지 길 중에 세 번째 논증(③가능성과 필연성으로부터의 논증)을 살펴봅시다. 여기서 (a), (b)로 구분한 명제는 이 논증의 핵심입니다.
(a)어떤 시점에선 자연의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b)과거의 언젠가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플란팅가가 지적하는 점은 (a)가 명백히 참이라고 할 수 없으며 (b)가 (a)로부터 반드시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것이 어떤 시점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시점이 반드시 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죠. 게다가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점이 반드시 과거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 시점은 미래일 수도 있으니까요.
결국 관건은 아퀴나스가 자신의 논증에서 가능성과 필연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필연적”. “우연적”, “가능한”, “어떤 시점의” 등 신 존재 증명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논증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날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플란팅가는 복잡하고 기나긴 분석과 논증 끝에 아퀴나스의 증명의 실패를 선언합니다.
앞서 본 논증과는 조금은 다른 성격의 논증 ⑤를 살펴봅시다. 목적론적 논증 이라고도 불리는 이 논증은 다른 방식의 신 존재 증명과는 달리 우리의 직관 에 더 강하게 호소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존재가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을 포함해 지능과 의식을 가진 동물들도 있고, 군집 생활을 하는 곤충도 있습니다. 이성적 사고 능력은 없는 것 같지만 햇빛을 보고 꽃을 피우는 식물도 있죠. 물론 생장 능력과 사고 능력이 모두 없는 바위 같은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들은 마치 어떤 목적을 향해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에는 놀라우리만치 복잡하고 정교한 질서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의 눈은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기린의 기다란 목은 높은 곳에 있는 열매를 먹기에 적합한 것처럼 보이고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있는 태양계는 생명이 탄생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환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미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요.
목적론적 논증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관찰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른 논증들과는 달리 경험적인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자연에서 다양한 질서와 규칙들을 발견합니다. 질서와 규칙이 하나도 없다면 보편적 학문이 성립하지 못할뿐더러 일상생활마저도 영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확인되던 중력의 법칙이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온전히 두 발로 걸어서 퇴근하기란 불가능할 테니까요.
이처럼 목적론적 논증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질서를 통해 이 세계가 지성을 가진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리적으로 제시합니다. 이 논증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주장을 조금 더 경험적이고 직관적인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무인도에서 책상이나 의자를 발견한다면, 누구라도 이 책상과 의자가, 파도에 부딪혀 깎인 바위와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그 책상과 의자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잡해 보이지만 질서를 갖춘 이 세계는 그저 아무렇게나 생긴 것이 아니라, 지성을 가진 어떤 존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증 역시 비판의 화살을 피해 가긴 어렵습니다. 먼저 오늘날 과학의 연구결과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신을 상정하지 않아도 생물학적으로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진화론에 따르면 오늘날 생물의 탄생과 진화는 어떤 합목적적 설계보다는, 단지 우연(확률)에 의한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적입니다.
목적론적 논증에 대한 철학적으로 가장 강력한 반론으로는 유비 추론(Analogy)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있습니다. 유비 추론이란 두 대상이나 현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 혹은 유사성을 바탕으로 내용을 설명하거나 추론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문명사회와 고립되어 오지에 사는 어느 부족을 만난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이 부족에게 그들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듣거나 보지 못한 비행기에 대해 설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동역학은 고사하고 엔진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들에게 비행기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비행기를 설명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 부족에겐 사람을 태워 나르는 가마 비슷한 들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새 사냥을 즐겨 하죠. 당신은 이제 부족 사람들에게 익숙한 들 것과 새의 날개를 가지고 비행기를 설명합니다. 날개 달린 들 것이 하늘 높이 날아서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는 비행기라는 탈 것이 존재한다고요. 완벽하진 않지만 원주민들은 이제 비행기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이와 같은 유비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영원하고 초월적인 존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추를 통해 간접적으로 신에 대해 이해해볼 수는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이 낳은 자녀를 사랑하듯이, 신은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을 사랑합니다. 책상이 목수의 정교한 계산과 손길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우주 역시 신의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들 것과 새의 날개를 가지고 비행기를 설명하는 일과,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단 하나의 창조자를 추정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시 부족에게 비행기를 설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원시 부족이 갖고 있는 지식과 비행기 사이에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주를 창조한 신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과는 어떠한 공통점도 갖지 않는 초월성(영원성, 무한함 등)을 지닌 존재에 관해 우리의 언어를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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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플란팅가는 역사 속 유신론적 논변들을 모두 반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신론에 대한 무신론의 공격이 성공적이라고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제기되어 온 악의 문제 (선한 신이 있다면, 대체 악은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설득력 있는 논증은 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악은 심정적으로 신이 없다는 느낌을 주지만, 신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악의 존재가 신의 부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그의 주장의 요지입니다. (악의 문제는 다른 지면에서 더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유신론과 무신론의 논증들이 모두 실패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우리는 신에 관해 과연 어떤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요?
플란팅가는 한 가지 흥미로운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사고방식의 과정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와 뉴스레터를 읽고 있는 구독자 여러분 모두 고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 이성과 의식을 지닌 존재가 나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잘 압니다. 발목을 삐끗해 정형외과나 한의원에 가면 의사가 1~10으로 통증의 정도를 물어봅니다. 발목이 너무 아파 10이라고 대답하면 의사는 적절한 조치(물리치료를 하거나 더 긴 침을 놓거나)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통증의 정도를 물어보면 환자는 이제 3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처럼 상대방이 나와 똑같이 통증을 느낄 수 있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으며 의식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의 상당 부분에 지장이 생길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나 말고도 다른 사람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 혹은 다른 사람도 나처럼 통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생각만큼 자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이 느끼는 방식대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뉴스레터 8회차 참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의 감각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 말고도 다른 사람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조차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진찰을 했던 의사는 알고 보니 정교하게 만들어진 로봇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죠. 타인에게도 나와 같은 의식이 있다는 사실은 오직 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만 알 수 있는 개연적인 사실에 불과합니다.
플란팅가는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우리가 오직 알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의 지각뿐임에도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타인의 통증이나 의식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당화됩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이 불합리하다거나 터무니없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는 설령 그 추론의 결과가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는 정당하다고 여겨집니다. 환자는 자신의 통증에 대해 거짓말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의사는 정말로 의식 없는 로봇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추론한 행위 자체가 부당하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느낌으로부터 타인의 존재와 통증을 추론하는 과정은 자연을 보고 그것의 창조자를 추론하는 것과 유사한 논리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우리가 관찰하는 자연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자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고심하여 만든 것처럼, 이 자연(우주)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존재와 고통을 추론하는 것이 단지 개연적일 뿐이지만 그 자체로는 합리적이라고 평가된다면, 자연물을 통해 그것의 창조자를 추론하는 것 역시 개연적이지만 합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이와 같이 신의 존재를 추론하는 과정을 불합리하다고 평가한다면, 우리가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의식과 통증을 추론하는 일 역시 불합리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 정말 이 세계를 만들었는지는 우리가 두 눈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참, 거짓의 결과와 상관 없이)신의 존재를 추론하는 과정 자체는 정당하다는 것 이 그의 주장의 요지입니다. (두 주장의 논리 구조에 대한 분석은 복잡하고 상세해서 뉴스레터에 따로 싣지는 않았습니다. 좀 더 찾아보고 싶으신 분들은 『신과 타자의 정신들』의 8, 9, 10장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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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플란팅가는 이와 같은 유신론의 답변에도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다만 그는 “어떻게 그 명제를 아는가?”, “그 명제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최선의 답변으로 유비적 추론이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는 실재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먼저 신의 존재는 인간의 도덕에 객관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전적으로 선한 신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주인이라면, 우리가 따라야 할 객관적 도덕법칙이 존재하게 됩니다. 도덕은 단지 인간들의 합의에 따른 산물이 아니며, 지배계층이 피지배층을 합리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음흉한 설계는 더더욱 아닙니다. 신의 존재는 도덕의 주인이 나 자신이 아닌, 인식 주관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것임을 의미합니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보편타당한 도덕의 근원으로서 신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또한 신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객관적 진리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이자 원동력이 됩니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믿음은, 우리가 이성을 통해 이 세계를 만든 신의 설계도를 읽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주가 그저 아무렇게나 생겨난 것이 아닌, 지성적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가 언젠가는 객관적 진리들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는 태도 역시 합리적입니다. 신의 존재야말로 우리가 허무주의와 비관론에 빠지지 않고 진리 탐구를 할 수 있는 원동력 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 존재 증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새로운 신 존재 증명이 또 있을까요? 그리고 21세기에 신의 존재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서구 문명의 정신을 지배했던 신의 존재는 확실히 예전보다는 그 영향력을 많이 잃어가고 있습니다. 신이 아닌 대안적 개념들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과정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의 존재만큼 중요한 철학적 화두는 또 없을 것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구독자님 모두 사유의 모험을 떠나는 기분으로 중세철학의 백미인 신 존재 증명을 공부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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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
마이클 L 피터슨, 『종교의 철학적 의미』, 하종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9
존 힉, 『종교철학』, 김희수 옮김, 동문선, 2000
F. 코플스톤, 『중세철학사』, 박영도 옮김, 서광사, 1989
<더 읽어보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1』, 정의채 옮김, 바오로딸, 2014
앨빈 플란팅가, 『신과 타자의 정신들』, 이태하 옮김, 살림, 2004
앨빈 플란팅가, 『지식과 믿음』, 박규태 옮김, IVP, 2019
리처드 스윈번, 『신은 존재하는가』, 강영안, 신주영 옮김, 복있는사람,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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