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57. 의미심장해 보이는 이 다섯 자리 숫자는 지난 2021년 한해 동안 출판된 신간의 숫자 입니다. 한해에만 64,657권, 하루로 치면 매일 180여 권의 새 책이 서점에 나온다는 뜻이죠. 평생 책만 읽으라고 해도 다 못 읽을 양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책이 나오는데, 두꺼운 철학책까지 읽으려면 대체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 걸까요? 가뜩이나 바쁘고 시간도 없는데 말이죠.
저는 철학 전공자로서 철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학문이라고 늘 강조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전공자들처럼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독자가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한 벽돌 책을 파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철학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못했다고 해서 좌절할 이유는 더더욱 없기도 합니다. 철학은 어디까지나 삶을 위한 사유의 도구일 뿐, 공부를 위한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인 학문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바쁜 일상에도 좋은 철학책을 읽고자 하는 구독자 여러분을 위한 실용적인 팁 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저의 경험과 취향이 반영된 철학책 고르는 방법과 추천 도서목록입니다. 구독자분들께서 철학책을 찾아 공부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① 저자/역자 확인하기
저자가 철학을 전공했는지를 먼저 확인합니다. 학사, 석사, 박사 혹은 인문 연구소든 상관없습니다. 공인된 학술기관에서 정식으로 공부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물론 철학 전공자가 쓴 글이라고 다 좋은 글인 건 당연히 아닙니다.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통찰력 있는 철학책을 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자가 철학을 전공했다면, 최소한 철학 사상사의 기본적인 개념과 논의들은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저자의 전공은 책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적 내용을 기대해도 괜찮다는 보증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비슷한 방법으로 번역한 사람의 전공을 확인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역자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아무 책이나 번역을 했는지, 아니면 해당 분야를 전공한 후 오랫동안 전공 분야의 책을 번역했는지를 체크합니다. 철학 전공자가 번역한 니체의 책과 독어독문학 전공자가 번역한 버전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번역한 사람이 원서에서 찾아 강조하는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거든요. 또한 이때는 일상용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철학자들이 사용한 특수한 개념과 용어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관건이 됩니다. (원서가 좋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오역이 넘쳐나는 경우가 대부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② 출판사 확인하기
철학 또는 인문고전을 중심으로 다루는 전문 출판사 들이 있습니다. 서광사, 아카넷, 한길사, 필로소픽 등이 있죠. 문예이론이나 프랑스 현대철학 등은 민음사나 문예출판사에서 자주 다룹니다. 각 출판사마다 집중하는 철학 분야가 조금씩 다르니, 직접 이것저것 찾아가며 확인해보면 좋겠습니다.
물론 요즘은 철학책 하나만 다루는 출판사는 거의 없습니다. 출판사가 워낙 다양한 종류의 책을 출판하다 보니 반드시 철학전문 출판사 책만 고집해야 하는 이유는 없는 것이죠. 다만 체크해야 되는 부분은 이런 겁니다. 내가 집어 든 철학책이 단지 출판사가 유행에 편승해 급조한 책인지, 아니면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으면서도 일반 대중이 접할 수 있도록 기획한 책인지를 확인합니다. 이를 알아보려면, 해당 출판사에 철학 관련 전집/선집 기획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플라톤이나 칸트 전집 시리즈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이처럼 전문 연구가들과 함께 오랜 시간에 걸쳐 사상가의 전집(혹은 선집)을 번역해 선보이는 기획이야말로 출판사가 얼마만큼 철학에 대해 진정성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③ 주석, 색인목록 확인하기
어떤 책이 좋은 철학책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대중 교양서로 가볍게 읽고 넘어가는 책들에는 보통 주석이나 색인목록이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책에 등장하는 내용들이 저자 본인의 아이디어인지, 아니면 기존에 학계에서 나왔던 이야기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또 책에 나오는 내용을 더 찾아보고 싶지만, 인용이나 출처 표기가 미흡해 검색이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반면 연구자 또는 철학 전공생을 위해 쓴 책들에는 주석(각주, 미주)와 색인목록(인물, 사상, 개념 등)이 매우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혼자서 철학을 공부할 때에 적합합니다. 누군가 옆에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혼자서 얼마든지 주석과 색인목록을 찾아가며 더 깊게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죠. 또 책을 읽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도 책의 주요 내용이 나온 부분을 손쉽게 다시 찾아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