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공부는 어떻게 해요?
철학 전공자로서 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위와 같은 질문에 이런 책을 살펴보고 저런 글을 읽어보시라고 했겠지만, 요즘은 그냥 유튜브를 한번 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철학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영상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유명 철학과 교수의 강연이 통째로 올라와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체계적으로(강제성!)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에게는 전기가오리와 같이 철학 강좌와 관련된 아이템을 유료로 제공하는 플랫폼이 적합할 것입니다. 확실히 지금은 굳이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아도 누구든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철학자들이 남긴 글에 밑줄을 긋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작업일까요? 또는 철학자의 유명한 말을 좌우명 삼아 삶에서 실천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철학을 공부하는 방법이 따로 있어서 마치 비밀스러운 뭔가를 배우듯 조용히 명상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철학은 철학자의 글과 사상을 해석하는 동시에 그것을 오늘날 나의 관점과 가치관으로 정리해보는 작업입니다. 우리 각자 얼굴이 다 다르듯이, 같은 철학자를 두고도 다른 관점으로 읽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철학책들이 비슷비슷해 보이면서도 조금씩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만나게 될 뉴스레터에서는 철학을 처음 공부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제가 생각하고 느꼈던 관점으로, 저만의 시선으로 음미한 서양철학사를 다룹니다.
그리고 이렇게 음미한 철학의 역사는 철학의 안쪽(철학 원전 텍스트, 철학사가들의 평가, 교과서적인 해설 등)에서 다루어지지만, 철학의 바깥(행간의 숨은 의미, 철학자와 철학사에 대한 재평가, 철학과 타학문과의 관계 등)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철학을 단순히 철학자의 텍스트 분석에만 한정하지 않고, 철학사와 철학자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해봄으로써 철학의 바깥에서 철학하는 과정을 뉴스레터에 담아볼 생각입니다.
구독자 여러분의 피드백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서양철학사는 권위 있는 학자들의 전유물도, 뉴스레터를 제작하는 저만의 창작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주 목요일에 만나는 뉴스레터가 철학의 바깥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오늘날 우리 삶을 이해하는 신선하고도 활력 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많은 이들이 서양철학의 출발점으로 밀레토스의 철학자 탈레스(Thales, c.626/623 – c. 548/545 BC)를 꼽습니다. 만물의 근원(arkhḗ, 아르케)를 제시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단순히 근원을 제시했다는 이유보다는 “만물(all things)”이라는 표현에 좀 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탈레스의 말은 “이 사물”, “저것”과 같은 개별적 존재에 대한 언급도 아니고 “태양”이나 “바다”의 탄생 신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위 문장은 모든 사물,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신화의 내러티브가 의인화된 존재들을 통해 자연현상이나 개별 사건 등을 다루는 것에 반해, 탈레스의 진술은 모든 사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보편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과 구분된, 이 사물들을 만들어 낸 보편적인 하나의 원리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죠. 이로써 신화적 설명(mythos)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이성(logos)의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물〔水〕은 물(物)이다
그런데 왜 하필 물일까요? 탈레스는 왜 정신이나 사랑과 같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질인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꼽았을까요? 그는 신화의 시대에서 철학의 시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있었지만, 여전히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물질을 사물의 근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방식으로 물이라는 근원에 도달하게 된 걸까요? 집안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물을 떠올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주변의 자연현상을 관찰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마도 모든 것의 자양분이 축축하다는 것과 열 자체가 물에서 생긴다는 것, 그리고 이것에 의해 모든 것이 생존한다는 것을 보고서 이런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형이상학』 A3. 938b6)
축축한 본성(physis hygra)이라는 물의 특징이 바로 물이 만물의 근원이 되는 주된 이유라는 것입니다. 또한 물은 쉽게 변형됩니다. 열이 되어 눈앞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얼음이 될 수도 있죠. 또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물을 필요로 합니다. 이처럼 인간 정신이나 내면이 아닌, 외부의 자연을 향한 관심으로 철학을 했다는 점에서, 탈레스는 사상가보다는 과학자 칭호가 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물의 속성이라는 부분을 가지고서 만물이라는 전체의 일반적 원리를 도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추론일까요?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이는 너무나 소박한 관찰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저는 맥락은 다르지만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c. 570 – c. 478 BC)의 다음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소들, 말들, 그리고 사자들이 자손을 갖는다면, 또한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사람이 만드는 것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말들은 말들과 소들은 소들과 유사한 신의 모습을 그릴 것이고, 각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형체를 만들 것이다.” (『학설집』 V. 109. 3)
놀랍지 않나요? 남들이 제우스 신전을 찾아 경배하는 신성한 순간에 어떻게 저런 불경한 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인간이니까 인간을 닮은 상을 세워 놓고 신이라고 숭배하는 것이다. 소나 말들 같은 짐승들이 사람처럼 손으로 조각을 했다면 자신을 닮은 형상을 지어 놓고 신이라고 했을 것이다’. 크세노파네스는 이 때문에 최초의 무신론자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비록 그가 남긴 이 말의 맥락은 신과 종교를 갖는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인식론적 한계를 표현한 데에 있지만, 특수한 시공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식과 사고는 언제나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상은 진공 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탈레스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가 단지 연금술이나 에테르(ether) 같은 허구를 믿었던 역사 속 인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걸까요? 아무래도 그가 직접 남긴 온전한 형태의 저작물이 전해지지 않을뿐더러, 남아 있는 그의 말조차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후대 철학자들이 해석하고 논평한 것들뿐이니, 그가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사고 과정을 온전히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20세기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불을 지핀 상상력은 다중우주, 평행우주 그리고 시뮬레이션 가설과 같은 다양한 생각들을 예술과 게임 등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을 찾아내고,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며 우주의 비밀을 조금씩 풀어나가는 인류는 자신만이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독단적 사고를 버리고 조금은 겸손한 태도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탈레스가 2024년에 태어났다면, 열심히 과학 공부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살았던 기원전 그리스에는 단지 값비싼 장비가 없었을 뿐이죠.
이처럼 철학자의 사상은 그것의 논리적 구조뿐만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환경, 그리고 철학자 본인의 기질 등이 얽힌 복합적인 결과물입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거스리(W.K.C. Guthrie)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철학자들은 진공 속에서 사색을 하지는 않으니, 그들의 사색의 결과들은 “기질 X 체험 X 이전의 철학들”의 산물로서 기술될 수 있겠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사색의 결과는 바깥 세계가 그 특정인에게 자기를 드러내 보일 때, 그것에 대해 보이는 그 특정인의 어떤 기질의 반응인데, 이 반응은 또한 대개의 철학자들의 경우에, 이전의 사상가들이 남긴 저술들에 관한 반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또한 단 두 사람의 바깥 세계들-즉 체험-도 똑같을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겠다. 철학의 궁극적인 물음들에 대한 대답들이 엄청나게 달랐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희랍철학입문』, p. 35)
탈레스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 즉 문명의 여명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철학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보편성에 대한 서술과 자연에 대한 관찰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서양철학사의 출발점에 선 인물로 기억될만합니다.
<함께 읽기>
W.K.C. 거스리, 『희랍철학입문』,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13
F. 코플스톤, 『그리스 로마 철학사』, 김보현 옮김, 철학과 현실사, 1998
<더 읽어보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15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상)』,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2009 |